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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30. 2019

크라잉 넛부터 전두환까지

유시민이 베스트셀러 작가인 이유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는다. 그제 시작한 앨리스 먼로의 흥미로운 연작소설 [거지 소녀]를 꺼내 읽을까 하다가 그 책은 자리에 누워서가 아니라 책상에 앉아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읽어야 제대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유시민의 에세이로 바꾼 것이다. 지난번에 전자책으로 다운을 받아 놓았을 때 읽다가 다른 책으로 넘어가느라 멈추었던 부분부터 다시 읽으려다 문득 그가 펑크밴드 '크라잉 넛'에 대해 썼던 게 생각나 다시 앞으로 갔다. 프롤로그 빼고는 처음 글인 <마음 가는 대로 살자>는 '나는 노는 게 좋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거기엔 자신과 달리 일중독에 걸린 박원순이라는 사람도 있다고 농을 치며 그렇게 죽으나 사나 일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은 그렇게는 못 산다고 엄살을 떤다. 그러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진정한 프로인데 자기가 생각하기엔 '크라잉 넛(Crying Nut)이라는 펑크록 밴드야말로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한다는 말을 툭 던진다.  

어느 날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버스비를 탈탈 털어 호두과자로 끼니를 때우며 집으로 가던 중 크라잉 넛이라는 밴드 이름을 생각해 냈다고 한다. 알고 보니 호두가 운 게 아니었다. 스스로를 '땅콩'이라 부르는 멤버들이 운 것이다. 호두과자로 허기를 달래고 집까지 걸어가야 하는 신세가 서러워서.

덕분에 나도 크라잉 넛이라는 밴드 이름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얻은 작은 수확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다음부터였다. 유시민은 크라잉 넛이라는 가벼운 소재로 시작해 자신이 1980년 5월이라는 역사의 현장에서 자신이 어떤 일을 겪고 어떤 선택을 했었는지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처음 밴드를 만들었던 나이에 나는 무엇을 했던가? 돌아보니 나도 그때 세상과 나름 격렬하게 부딪혔다. 바람이 불면 사물이 각자 다른 소리를 내는 것처럼, 사람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과 부딪혀 제각기 색깔이 다른 삶을 산다. 그 나이에 나는, 아무도 요청하지 않은 '구국의 결단'을 제 멋대로 내려 대통령 자리를 도적질 한, 개성 있는 외모를 가진 무식한 장군한테 대들었다가 크게 혼이 나는 중이었다.
나는 스물두 살 대학 3학년생이었던 1980년 5월 17일 자정 가까운 시각, 학교에서 붙잡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갔다. 맡은 직잭이 총학생회 대의원 의장이라 검거 대상자 명단에 일찌감치 올라 있던 터였다.

놀라운 글쓰기 테크닉이다. 만약 그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당장 1980년 역사의 현장으로 갔다면 그건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흔히 저지르는 '당위에 대한 강요'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고 알량한 경력에 대한 엘리트의 자랑질로 읽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실제로 얼마 전 유시민이 TV 프로그램에 나가 이 얘기를 한 것 때문에 변절자 심재철 의원은 그의 이야기가 사실과 다르다고 시비를 걸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인생에서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에 대한 예로 크라잉 넛이라는 밴드 얘기를 하다가 거기서 어떤 공통분모를 발견한다. 바로 스무 살이라는  키워드다. 누구는 그 나이에 배가 고파도 하고 싶은 음악을 하자며 펑크밴드를 결성하고 누구는 불합리한 권력에 맞서 목숨을 내놓을지라도 할 수 없다며 군부독재와 온몸으로 부딪힌다. 스무 살은 인생의 방향과 태도를 결정하는 나이니까.

다행인 것은 그러면서도 유시민이 자신의 인생을 크라잉 넛보다 위쪽에 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도 펑크록을 하며 즐겁게 살지만 자신은 하고 싶은 대로 인생을 살지 못했고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지도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아직 '절반'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들은 좋아하는 놀이를 직업으로 삼았다. 이것만으로도 '절반'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인생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일과 놀이가 인생의 절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사랑과 연대(Solidarity)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크라잉 넛 멤버들이 이 나머지 '절반'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임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절반' 성공했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크라잉 넛의 책을 읽으면서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들에게 크게 빚졌다고 생각한다. 그 빚을 갚고 싶다. 그래서 그들도 이 책을 읽기 바란다. 인생의 나머지 절반도 소신대로 하기를 기대한다.  

아마도 유시민은 예전에(또는 이 책을 쓸 무렵에) 크라잉 넛이 쓴 책을 읽은 것 같다. 스무 살 무렵 밴드를 결성하고 호두과자를 사 먹느라 집까지 걸어갔던 멤버들의 에피소드를 읽으며 애잔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평소의 생각과 일치하는 지점을 찾아내고는 뭔가를 급히 메모했을 것이다. 그리고 출판사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에세이를 내보자는 전화가 온다. 이런 글쓰기라면 나는 계속해서 유시민이 쓰는 글이나 그의 인생을 궁금해할 것 같다. 뭔가를 읽어야지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흥미로워서 펼쳐 읽기 시작했는데 계속 따라 읽다 보니 어느덧 그가 추구하는 '인생의 가치'라는 화두에 올라타 같이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나 관료 말고도 오랫동안 역사나 경제 분야 책을 쓰면서 지식소매상으로 살아온 유시민. 그가 에세이 분야에서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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