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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n 26. 2019

역사소설로 풀어놓은 김탁환의 작가론

[대소설의 시대]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를 읽다 보면 4천 년 전 이집트의 젊은이들도 저녁에 긴 대화를 나누고 싶으면 맥주집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물론 지금 우리가 가는 칵테일 바나 호프집은 아니겠지만 그때도 사람들이 맥주를 마셨나 하고 놀라게 된다. 김탁환의 소설 [대소설의 시대]를 읽으면서도 마찬가지 생각을 했다. 18세기 조선이라는 시공간에 지금보다 훨씬 호흡이 길고 유장한 소설을 쓰거나 읽거나 필사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았을 줄이야. 더구나 그냥 소일거리로서의 이야기책이 아니라 엄격한 구상과 서술과 비평을 필요로 하던 '대소설'이라는 장르가 한때 융성했었다니. 우리에겐 왜 세르반테스 같은 이야기꾼이 없나 투덜대는 사람들은 김탁환의 신작 [대소설의 시대]을 읽어보라.  우리가 꿈에도 몰랐던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가 끝없이 펼쳐지니까. 이건 중국에도 없었고 일본에도 없었던 이야기의 신세계임과 동시에 시대를 초월해 21세기의 김탁환과 18세기의 임두가 생각하는 소설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23년째 <사해인연록>이라는 세책방 인기 연재소설을 줄기차게 발표하던 얼굴 없는 작가 임두가 갑자기 사라졌다. 의빈으로부터 이 실종사건을 해결하라는 명을 받은 '백탑파 시리즈'의 명콤비 이명방과 김진의 활약이 시작된다. [방각본 살인사건]부터 시작해 [이토록 고고한 연예]까지 등장하던 쥐 영감의 세책방을 중심으로 '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여자 작가들과 여자 독자들이 호응하여 커진 상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번에도 의금부 도사 이명방과 꽃에 미친 사내 김진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은 물론이다.


책이 출간된 지 얼마 안 된 새벽, 여행지 부산에서 김탁환의 [대소설의 시대] 1, 2권을 다 읽었다. 끝나는 게 아까워 일부러 천천히 읽었는데도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저 혼자 달려가더니 어느덧 끝이었다. 이 소설은 18세기 조선에서 융성했던  대소설을 소개하는 이야기임과 동시에 작가 김탁환이 역사소설을 빌미로 펼쳐놓는 작가론이기도 하다. 소설가 임두가 제자들에게 '공든 탑을 무너뜨려라'라고 가르치는 것은 작가가 초고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명쾌한 격언이다. "스승님은 하루를 양분하여 절반은 쓰고 절반은 읽으셨습니다. 늘 강조하셨죠. 쓰는 시간이 읽는 시간보다 많으면, 작품은 쪼그라든다고." 라는 경문의 말은 '좋은 작가는 언제나 좋은 독자였다'는 현대의 격언을 의고체로 바꿔놓은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마상무술의 달인이자 소설 애호가인 야뇌 백동수가 '제대로 살기 위해,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는 고백은 그대로 우리가 왜 21세기에 와서도 자기계발서 대신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를 간명하고 진솔하게 설명해준다.


또한 이 책은 감탁환이 이전에 지어낸 방각본 살인사건, 조운선 침몰사건, 거짓 열녀 색출사건까지 모두 연결되어 있는 종합선물세트이며 짜릿한 스토리텔링과 수많은 스타들이 출연하는 엔터테인먼트 소설이기도 하다. 캐스팅도 화려하다. 주인공인 김진과 이명방은 물론 김덕성, 김홍도, 정약용 등 우리가 역사책에서 익히 보아왔던 인물들이 무시로 등장하고  병풍 뒤를 잘 살펴보면 스티븐 킹도 앉아서 힘을 빌려준다. 임두가 쓰고 있는 소설을 읽고 창화공주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떼를 쓰는 의빈 마마는 [미저리]의 열혈독자와 똑같지 않은가. 또 [옥원재합기연]을 권하는 장면에서는 심리적 CPR의 전도사  정혜신 이명수 커플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내와 내가 진행하는 독서모임 '독하다 토요일'에 [이토록 고고한 연예]에 대해 특강을 하러 온 김탁환에게 들은 기억이 있다. 자신의 학부 전공이 18세기의 한글소설들을 읽는 것이었는데 일단 그렇게 많은 소설이 있다는 것에 놀랐고 그걸 다 읽느라 정말 토할 정도로 고생을 했다는 것이었다. 얘기를 들어보면 그 말고도 대소설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또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알기만 하면 무엇하나. 쓰지 않으면 도무지 소용이 없다. 써야 소설가다.


필립 로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걸 소설로 쓰면서 삶의 비밀을 탐구했다고 한다. 아마 김탁환도 자신이 이십 년 넘게 매달려온 소설 쓰기란 무엇일까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런 작가적 궁금증 덕분에 우리는 [대소설의 시대]라는 흥미진진한 역사추리소설을 또 하나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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