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도 지옥도 없다 믿지만
별로 친하지 않던 고등학교 동창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가 사기를 당하고
암에 걸린 남자가 있었다
암은 온몸으로 퍼졌고 그는 죽었다
저승에 도착하니 입구에서
심판관이 아는 척을 했다
돈을 떼어먹고 간 친구였다
그의 직업이 심판관이었다
교통사고로 급사했다고 한다
저승에도 직업이 있나 생각하다가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화를 냈다
그는 웃으며 저승엔 법이 없다 했다
염라의 말이 법이고 규칙이었다
더 이상 친구를 원망할 수 없었다
남자는 지옥으로 가게 되었다
청렴하게 살았지만 두 번
작은 뇌물을 받아먹은 적이 있었다
천국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지옥은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소리를 질렀지만 이상하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지옥은 재밌었다
거꾸로 칼을 꽂아 놓은 곳에
반복해서 떨어지거나
유황불에 타는 일 따위는 없었다
다만 학교에 다녀야 했고
취직을 해야 했으며
결혼해서 애를 낳으면
애들은 하나같이 삐뚜로 나갔다
이거 전에 살던 세상이랑
너무 똑같네, 라고 하면
SF소설 쓰고 있네
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걸 다섯 번쯤 반복하자
조금 익숙해졌다
니체의 영원회귀 토픽에 의하면
이건 초기 단계였다
영원히 반복되지만
포기하지 않는 자가 이긴다, 라는
아이러니가 요설의 핵심이었다
별로 친하지 않던 고등학교 동창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가 사기를 당하고
암에 걸렸다
암은 온몸으로 퍼졌고 죽었다
변하는 건 없었다
마음에 없는 반성문을 쓰다가
심판관에게 외쳤다
나 착한 일도 많이 했어요
이제 마침표를 주세요
여기 마침표는 없는데,
대신 쉼표를 몇 개 줄게
그가 선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은 지옥,
쉼표가 천국이었다
좀 쉬며 생각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