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혁 작가와 김정 연출, 그리고 성북동소행성
오전에 아내와 함께 치과에 가서 스케일링을 하고 동네 식당에서 밥을 먹은 뒤 서점에 들러 주문했던 책을 찾아오던 날이었다. 커피나 한 잔 하고 가자는 아내의 말에 새로 생긴 커피숍에 가서 책을 읽던 우리는 이제 집에 가자, 는 말과 함께 천천히 성북동 큰길을 따라 내려왔다. 구포국수 앞을 지나다가 아내가 "오 작가님이다!"라고 외쳤다. 쳐다보니 오세혁 작가가 구포국수 안에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거짓말처럼 김정 연출이 앉아 있었다. 우리가 천재라고 했던, 연극 《이 불안한 집》의 그 김정 연출 말이다!
아내와 나는 자석의 힘에 이끌려가는 쇠구슬처럼 쪼르르 술자리로 달려가 앉았다. 오세혁 작가는 우리가 지나갈 줄 알았다는 거짓말을 했다. 아니, 혹시 지나갈지도 몰라, 하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를 구포국수로 잡았다고 했다. 이유는 아내와 내가 쓴 리뷰에 자극받아 '이 불안한 집'이라는 연극을 보았는데 그걸 보고 나자 김정 연출과 꼭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극작가인 오세혁 작가가 연출가인 김정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에 스쳐가듯 만난 적은 있지만 5~6년 만에 갑자기 연락해서 만나자고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세혁 작가는 이 생각이 한밤중에 났지만 그 시간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술 마시고 하는 소리로 오해할까 봐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오전 10시에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우리는 그 세심하고도 소심한 배려에 감탄하면서 막걸리 잔을 부딪혔다. 홍어와 돼지고기 수육, 묵은 김치가 어우러진 삼합 안주를 시켜 놓았는데 아무도 젓가락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김정 연출과 우리는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아내와 나는 다섯 시간에 달하는 그의 작품을 두 번이나 보았고(아내는 세 번!) 김정 연출은 우리가 쓴 연극 리뷰를 찾아서 읽어보았으므로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이런 걸 생각하면 연극을 보고 짧게라도 리뷰를 쓴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글은 언제나 뜻밖의 만남과 호의를 만들어준다.
우리의 에코백 안엔 방금 산 김탁환 작가의 『사랑과 혁명』 세 권과 정지아 작가의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불멸』 이 들어 있었는데 가방을 추스를 때 쿤데라의 책을 슬쩍 본 김정 연출은 자신이 왜 그리스 비극을 택해야 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요즘 자신을 얽어 맨 화두는 감동인데 그냥 감동이 아니라 '압도적 감동'이라는 것이다. 압도적 감동은 어디서 오는가. 그건 인간 본성의 밑바닥까지 가야 찾을 수 있는 것이고 이야기의 원형을 다시 탐구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마침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재해석한 영국 작가 지니 해리스의 극본이 있었다. 그가 2,500년 전 아가멤논과 클리템네스트라의 이야기인 《이 불안한 집》을 연출하게 된 이유였다. 여기에 그를 전율하게 만들었던 말러의 교향곡이 더해졌다.
술잔과 젓가락 사이로 연극과 뮤지컬 이야기가 음악처럼 오고 갔다. 스타 파워가 관객 수를 좌우하는 대형 뮤지컬 작품들을 예로 들며 진정 관객이 원하는 건 '쉽고 달달한 이야기'뿐인가 하는 걱정이 있었고 이러다가는 모든 작품이 다 연극 특유의 실험성을 빼앗겨 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오갔다. 공짜를 밝히던 한 평론가가 초대받은 연극의 마지막 티켓 수령 과정에서 오천 원을 내야 한다는 말에 "그럼 말고."라며 거절한 얘기에 이르러서는 모두 혀를 끌끌 찼다. 나는 전날 강연 때문에 날짜를 연기했던 근력학교에 가서 운동을 하야 하는 날이었으나 이런 재미진 자리를 놔두고 헬스클럽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근력학교보다 더 강력하게 술자리를 방해하는 요소가 나타났다. 구포국수 사장님이 오후 4시부터는 브레이크 타임이므로 술자리를 마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우리 집으로 이 차를 가자고 말했다. 마침 가을 햇볕도 좋고 우리 집엔 마당도 있으니 야외에서 술자리를 갖기 딱 좋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오세혁 작가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술집 가기에도 눈치가 보인다고 했더니 오세혁 작가는 자신이 한 때 판소리를 배워서 그렇다고 변명을 하는 바람에 모두 박수를 치며 웃었다. 내가 마트에 가서 참치캔과 스위트콘을 사서 집으로 가보니 이미 마당엔 테이블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엔 와인병과 잔이 놓여 있었다. 아내가 내온 치즈와 배 안주와 함께 와인을 마셨다. 연극에 진심인 사람들이기에 대화의 내용은 전부 연극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불안한 집》에 출연한 여승희, 공지수, 신윤지 배우 들에 대한 칭찬이 쏟아졌고 우리가 윤성원 배우의 팬이라고 밝히자 언제 한 번 윤 배우까지 동반해서 같이 술을 마시자는 김정 연출의 제안이 있었다. 우리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윤성원 배우 부부는 이미 우리 집에 한 번 초대하기로 약속까지 해 놓은 상태였으니까.
"제가 스파게티는 좀 해요."라는 말과 함께 아내가 안주로 맛있는 스파게티를 한 접시 가득 내왔다. 또 와인을 한 병 땄다. 《이 불안한 집》을 공연하는 동안 배우나 스태프들이 얼마나 초 긴장 상태였을까 하는(도중에 한 사람이라도 아프거나 사고가 나면 공연이 펑크가 나므로) 우리의 감탄 뒤에 '작품이 끝난 뒤 좋은 작품을 했다는 자부심에 다들 신이 나 어쩔 줄 몰라했다'는 김정 연출의 증언이 이어졌다. 또 와인을 한 병 땄다. 배우들을 어떻게 그리 완벽하게 조련했느냐는 나의 어리석은 질문에 질책보다는 칭찬과 격려, 관심으로 일관했다는 김정 연출의 어른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는 건 세찬 바람이 아니라 햇볕이었음이 또 한 번 증명된 것이다. 나는 판소리의 추임새를 예로 들며 서울시민대학 글쓰기 교실에 찾아왔던 학인 얘기를 했다. 부정적인 피드백에 상처를 받은 분께 나는 말했다. 저는 부정적인 리뷰는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건 언제나 칭찬이니까요.
또 와인 한 병을 땄다. "우리 집에 와인이 이렇게 많았나?" 내가 중얼거렸다. 네 병째였다. 오세혁 작가가 취했다. 툇마루에 십 분만 누워 있겠다고 하길래 방으로 들여보냈다. 침대에 누워 한 시간을 자고 일어난 그는 "제가 잤나요?"라고 뻔뻔하게 물었다. 아내도 술을 못 이기고 들어가 잤다. 김정 연출과 나는 다섯 병째 와인을 마시다가 코르크 마개로 병을 막았다. 겨우 일어난 오세혁 작가와 함께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연극에 대한 이야기로 꽉 찬 낮과 저녁이었다. 나도 아내 곁에서 자다가 일어나 보니 새벽 한 시였다. 둘 다 눈을 뜬 아내와 나는 천하의 연극쟁이들과 함께 한 극적인 하루를 생각하며 낄낄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