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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04. 2023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춘을 닮은 연극

연극   <춘천 거기 for creative> 리뷰

불이 켜지면 무대 위엔 극작가 수진이 나와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의 한 대목을 읊는다. 새로운 연극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커플 1주년을 맞은 명수와 선영이 각각의 일터에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평일 휴가를 즐기는 깜찍한 모습이 나온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명수와 그런 그를 응원하는 선영. 방 안에서 뒹굴며  껴안고 키스하고 일주년 기념 선물로 반지를 사네 마네 하며 콩닥거리는 두 사람이다. 그런데 갑자기 울린 스마트폰 벨소리에 명수가 전화기를 열면서 "응, 여보..."라고 한다.  도대체 두 사람 사이는 어떤 관계일까.


춘천 가는 철길이 보이는 포스터의 제목 아래 '열여덟 해, 참 반가우신 손님'이라는 카피를 붙여 놓은 연극 <춘천, 거기>를 오랜만에 다시 보았다. 2005년에 김한길 작가(소설가이자 정치가인 최명길 남편,  그 김한길 말고)에 의해 초연되었던 이 연극은 이듬해에 '올해의 예술상' 연극부문에 선정될 정도로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사랑을 받아 이제 열여덟 해가 된 것이다. 청춘, 하면 떠오르는 게 뭘까. 사랑과 섹스, 그리고 술, 뭐든 서툴고  급하게 하느라 망쳐버리는 일들, 그래서  앞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 이런 것들이 아닐까. 연극엔 명수와 선영처럼 불륜을 저지르는 커플도 나오고 세진과 영민처럼 데이트 폭력이 얼룩진 사랑을 이어가는 커플, 그리고 예쁘게 사랑을 시작하는 주미와 응덕 커플도 있다.


응덕이 운영하는 춘천의 한 펜션에 이들이 모두 모이게 되면서 이야기는 하나로 뭉쳐진다. 대학  MT 가느라 누구나 한 번은 가 봤던 그 춘천에 다시 모인 그들이   함께 모여 술을 마시며 하는 게 뭐 있겠나. 얼굴에 플래시 불빛을 비추고 무서운 얘기를 하다가 와 비명을 지르며 웃거나 진실게임을 하는 건 보너스 같은 웃음 포인트이고, 그러다 또 취한 놈이 소리를 지르면 그걸 말리다가 판이 깨지고...... 다음날 새벽, 술병이 뒹구는 방바닥에서 잠이 든 남자애들의 모습은 너무 적나라해 가슴이 아프지만 결국 그건 우리가 지나온 청춘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는 생각에 결국 미소를 짓게 된다.


이전 작품들에서 눈여겨보았던 유지연 배우의 연기가 보고 싶어서 갔다. 요즘 TV에도 자주 나오는 그의 연기는 연약한 듯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주미 역의 전수희 배우나 상대 응덕 역의 전대현 배우 때문에 많이 웃었다. 대사에 BTS 얘기가 나오는 등 대본도 현대적으로 많이 바뀌었다. 그래도 18년 전 청춘은 여전히 지금도 청춘이라 특유의 방황과 싱그러움은 그대로다.  그래서 몇 년 후 수진과 병태가 새로 올린 연극 '젓갈과 동치미(적과의 동침에서 이렇게 바뀌었다)'에서 만난 그들의 모습은 좀 쓸쓸하지만 사랑스럽다.


기형도의 시에 나오는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지나온 나날들을 헤아려 보았으니'라는 대목이 생각났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아냐, 그때는 누가 누구랑 잔 게 그렇게 중요했지. 지금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세진과 영민 커플은 헤어져야 해. 명백한 데이트 폭력이잖아."라고 화를 내는 바람에 정신이 돌아왔다. 아내는 연극이 끝나고 병태 역을 맡은 강우람 배우가 나와 낸 퀴즈를 맞히는 바람에 선물을 받아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이런 작품이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 너무 어렵지 않고 드라마처럼 따뜻한 이야기라 연극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도 즐길 수 있다는 미덕일 거야, 같은 이야기를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에서 2023년 11월 12일까지 상연한다. 데이트 연극으로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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