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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05. 2023

극본을 너무 잘 쓴 연극을 보는 쾌감

연극  《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까》 리뷰

미국 대학의 학비는 비싸기로 유명해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학자금을 갚기 위해 고급 콜걸 아르바이트를 하는 캐릭터를 자주 볼 수 있다. 백악관 이야기를 다룬 《웨스트 윙》에도 초반에 그런 인물이 등장하고 괴짜 의사가 주인공인 《하우스》에도 나온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리지는 콜걸은 아니지만 누드모델로 활약했던 과거가 밝혀지자 “그래도 나는 이 일을 해서 학자금 빚을 다 갚았어, 이 자식아! “라고 일갈하기도 한다. 왜 이 이야기를 하냐 하면 어제 봤던 연극  《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까》에 나오는 미란다도 딱 그런 처지였기 때문이다. 잠깐 런던에서 공부하던 엄마가 지도교수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게 바로 미란다다. 미란다는 엄마의 지적 허영심 덕분에 대학에서 시와 문학을 전공했지만 몸에 밴 사치와 학자금 융자 덕분에 28만 달러의 빚을 지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고급 콜걸 노릇을 한다. 중학교 선생을 잠깐 했는데 학교는 좋지만 학생들을 감당하는 건 너무 힘들고 싫어서다. ‘슈가 대디’라는 만남앱을 통해 알게 된 데이빗은 만나서 섹스를 할  때마다 그녀에게 돈을 주지만 미란다는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려 하는 데이빗에게 염증을 느낀다. 할로윈 주말에 역시 만남앱을 통해 만나게 된 중동 남자 샤티쉬를 화나게 한 미란다는 술집에서 당장 칼로 찔러 죽이겠다고 덤비는 그를 피해 할로윈 복장 그대로 바텐더 타냐가 사는 바닷가 주말별장으로 몸을 피하고 그 와중에 데이빗의 이메일을 해킹해 그까지 위험에 빠트리는 소동을 일으킨다.


이 작품은 미국의 유명한 드라마 작가 지나 지온프리도의 최신작이다. 그레이엄과 타샤의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연극은 찰진 대사와 대비가 확실한 캐릭터들,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할로윈 복장 덕분에 계속 웃음이 터지는 블랙 코미디다. 6개월 전 죽은 엄마가 남긴 산더미 같은 원고 박스들을 버리지 못하는 그레이엄 역의 송철호 배우나 그레이엄에게 어서 일을 시작하라고 채근하는 미혼모 타냐 역의 서미영도 뛰어난 연기를 선보이지만 역시 최고는 미란다 역의 이지혜 배우다. 전작 《집에 사는 몬스터》에서 열세 살짜리 소녀로 나올 때를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변신인데 검은색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고 마녀처럼 웃으며 술을 마시는 모습이 원래 그녀인 것처럼 딱 어울렸다.

개인적으로 제일 웃겼던 장면은 어린왕자 복장을 한 데이빗이 별장에 나타났을 때였다. 그는 자신의 이메일을 해킹하고 샤티쉬에게 자신의 주소까지 알려준 사실을 들먹이며 “미란다가 왜 살해 위협을 당하는지 짐작이 가시죠?”라고 빈정거리지만 미란다가 툴툴거릴 때마다 “귀여워!”라고 감탄하며 애정을 과시한다. 그는 성형수술 시술을  통해 많은 돈을 번 부자지만 화이트샌즈 호텔로 가서 쉬라는 타샤의 제의를 거절하고 포인트를 쓸 수 있는 싸구려 호텔을 택할 정도로 계산적이다. 쓸데없는 데 돈을 왜 쓰냐는 이 남자에게 ‘언제든지 코코아와 과자를 먹을 수 있었던 고풍스러운 도서관의 추억’을 자랑하는 미란다는 불쌍한 몽상가일 뿐이다. 그는28만 달러의 빚을 갚아주면 미란다가 다시는 자신을 만나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말끝마다 자기계발서를 들먹이는 타샤와 데이빗은 죽이 잘 맞는 편이다. 그레이엄과 엄마 사이의 비밀이 밝혀지는 클라이막스를 지나 마지막에 딱 한 장면 싱겁게 등장하는 샤티쉬 역으로 누가 나오는지 궁금했는데(캐스티보드에 물음표 표시가 되어 있었다) 나중에야 윤일식 배우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도 작은 재미다. 연극이 끝나고 나오면서 아내와 함께 극본이 좋으면 연출이나 연기는 따라오게 마련인데 이 연극이 그렇다, 역시 연극은 하룻밤에 이루어지는 소동극이 최고다, 등등의 소감을 얘기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프로덕션 IDA의 작품이고 동숭동 나온씨어터에서 2023년 11월 12일까지 상연한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더 보고 싶은 연극이다. 강추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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