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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17. 2023

잠이 안 올 때 꺼내 읽으면 좋은 짧은 이야기책

유이월의 『찬란한 타인들』


너무 피곤해서 누웠는데 잠은 안 오고 눈이 더 말똥말똥 해지는 경우가 있다. 어제가 딱 그랬다. 요즘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카피와 아이디어 설명이 들어 있는 PPT를 다 수정하고 한 시쯤 누웠는데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며칠간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던 것 같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일어나 시계를 보니 새벽 네 시였다. 세 시간을 전전반측했던 것이다. 나는 마루로 나가 책장 앞을 서성이다가 이럴 때 어울리는 책을 한 권 찾아냈다.  유이월의 『찬란한 타인들』이라는 짧은 소설집이다. 페이스북 친구이기도 한 유이월 작가는 문학을 전공하고 글과 관련된 여러 가지 직업을 거치다가 결혼 후 미국에서 10년을 살았고 지금은 한국에서 작은 사업체를 꾸리고 있는 재주꾼이다. 미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그런 스타일을 좋아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의 소설은 미국 사람이 썼다고 해도 당장 고개를 끄덕일 만큼 장소도 이국적이고(켄드릭 스트리트, 데스틴 해변이 도대체 다 어디야?) 등장인물들도 모두 찐한 미국식 이름이다.


수록된 소설들은 어찌나 짧은지 어떤 건 한 페이지를 겨우 넘기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여자와 자고 일어나 이상한 대화를 나누다 느닷없이 끝나는 「유의미한 타인들」의 마지막 문장들이 좋았고, 전직 정보 보안 전문가가 어떤 귀부인의 의뢰를 받고 찾아간 해변의 술집에서 '열어보면 안 되는 USB'를 돌려받기 위해 바텐더를 카운터 안쪽 비상구로 불러내  권총을 목에 들이대고는 '요샌 총 없이는 일이 잘 안 풀린다'라며 다시 그 바에 앉아 유유히 술을 마시는 이야기 「비밀을 지키는 법」이 특히 좋았다. 한 편씩 짤막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마치 이디스  워튼이나 셜리 잭슨의 글처럼 나른하고 허무한 데다 작은 반전들을 숨기고 있어 사랑스럽다. 만난 사람은 언젠가 헤어지기 마련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헤어질 날을 계산하다가( 837일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호텔에 불이 나 19일 만에 헤어지게 되는 연인의 바보 같은 사연엔 비릿한 유머가 숨어 있고 오늘 읽은 「물귀신 매트릭스」는 사람이 아닌 물귀신의 억울한 사연을 짧게 소개해서 새벽부터 사람을  허무하게 웃겼다.


유이월이 바라보는 인간은 대개 비이성적이고 살짝 이상하면서도 서글프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는 아내 몰래 아내의 친구와 출장을 가 호텔에서 섹스를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별 것 아닌 이유로 그 여자가 싫어져 다시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하지만 아직 안 읽은 작품이 조금 남아 있으니까 그 목록은 바뀔 수도 있다. 또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이어서 읽어볼 생각이다. 아, 어쩌면 낮에 읽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회사를 다니지도 않고 또 이렇게 재밌는 책을 수면제 대용으로만 쓰는 건 작가에게 대단히 실례일 수도 있으니까(책표지의 옛날 해수욕장 모습은 오중석 사진작가가 중고시장에서 우연히 샀다는 필름 뭉치에서 찾아낸 작품들로 전시를 했던 때가 생각나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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