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Nov 11. 2023

춤을 추는 이순신이라니,  신선했다

창작가무극 《순신》리뷰

이순신 역을 맡은 배우가 서울예술단의 무용단원이라는 얘기를 듣고 처음엔 의아했다. 아니, 중요한 역할이고 심지어 타이틀 롤인 순신 역을 왜 연기 못하는 무용수에게 맡기는 모험을 할까? 하지만 극이 시작되고 "꿈을 꾸었다..."라는 순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부터 의문은 해소되기 시작했다. 흰옷에 풀어헤친 머리를 하고 나타난  형남희의 목소리는 깊고도 성량이 풍부했고 함께 등장한 다섯 명의 코러스와 그가 단련된 몸으로 표현하는 화려한 동작들은 이순신의 고뇌와 절망을 표현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헤드윅》 《로키 픽처 쇼》 등으로 유명한 뮤지컬의 대모 이지나 연출은 8년 전 이 작품의 연출 제의를 받고 바로 이자람에게 연락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작가 김선미, 작창 이자람, 연출 이지나 등이 모여 서울예술단의 가무극 '순신'이 탄생했다.

이 작품엔 순신 역의 형남희 말고도 수많은 뮤지컬 배우들이 출연하지만 작창가이자 배우인 소리꾼 이자람 얘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극의 흐름을 설명하고 오로지 목소리와 동작으로 클라이맥스까지 만들어내는 무인(巫人) 역의 이자람은 초반엔 래퍼를 방불케 하는 빠른 장단으로 혼을 쏙 빼놓더니 2부를 지나 죽은 장군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질 때는 객석에서도 같이 울음이 터졌다. 나도 세월호 희생자들 이름을 부르던 김관홍 잠수사나  1987년 신촌에서 민주열사들의 이름을 외쳐 부르던 문익환 목사가 생각나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와 같이 이 가무극을 보던 아내는 이자람이  북이 있는 OP석까지 나와 외칠 때는 정말 숨이 멎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이순신은 거의 혼자 몸으로 나라를 지켜낸 영웅이지만 조정의 대신들에게 모함을 당해 여러 번 강등당했던 불행한 인물이다. 심지어 임금인 선조는 그의 인기를 시기해 죽이려고까지 했다. 이 작품에서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스스로 북을 치는 자리에 올라 적들의 표적이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이런 배경 때문에 '이순신 자살설'이 계속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나를 위로한 한 장면은 꿈속에서 순신이 어머니를 만날 때였다. 전쟁을 하느라 제대로 상도 못 치러 죄송하다는 순신에게 어머니는 "그래도 네가 살린 많은 목숨 때문에 나는 여기서 마음 편하게 지낸다"라고 말한다. 쉰들러라는 몽상가가 만든 '쉰들러 리스트' 덕분에 많은 유태인이 살아난 것처럼 조선에서는 이순신이라는 개인 덕분에 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어쩌면 한 개인이 이룰 수 있는 업적의 정점이 이순신이 아닌가 한다.


음악과 노래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이자람의 판소리와 달리 다른 출연자들의 노래는 전형적인 뮤지컬 창법이다. 뮤지컬 특유의 '쪼'로 이루어진 노래들은 내 귀엔 다 비슷비슷하게 들렸다. 노래를 잘 하긴 하지만 지루했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내가 뮤지컬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좀 더 뮤지컬 작품을 많이 보며 공부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가 이 연극을 할인 가격에 보기 위해 서울예술단 회원으로 가입을 했다는데 그 덕분에 표를 받으며 리플렛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리플렛 앞부분에 있는 이유리  단장 겸 예술감독의 글이 훌륭하다. 특히 뒷부분에 '왜 하필 지금 <순신>일까요?'라는 글은 우리에게 던지는 소중한 메시지다. 그는 자문자답한다. 이순신을 죽이려 했던 선조와 조정 대신들을 지금 바라보면 너무나 명백한 오류인 걸 알 수 있지만 정작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지금의 현실이 복잡하고 어렵기만 하다. 그런데 '산처럼 무겁고 조용히 스스로 행동하고 심신의 고통이 극에 달해도 소명을 위해 초지일관했던,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위기 대처 능력 뛰어난 전략가로 살았던'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삶의 좌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는 것이다. 무릇 예술단의 수장이라면 이런 정도의 통찰은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감탄하면서 앞으로 서울예술단의 행보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기로 결심했다. 2023년 11월 7일부터 26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상연한다. 이자람의 팬이라면 놓치지 않으실 것이라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주는 연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