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원의 『월급쟁이 이피디의 사생활』
서울대를 나와 SBS PD를 할 정도면 별 어려움 없이 살아왔을 것 같지만 저자가 살아온 과정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도 않아 마음이 놓이는(?) 책이다. 서울대는 재수를 해서 시험을 쳤는데 떨어졌다가 '추가모집'으로 겨우 들어갔고 친구들이 국가고시나 대기업에 합격할 때 그는 엉뚱하게 아프리카로 여행을 갔다. 여행작가가 될 기회를 얻어 미친 듯이 원고를 썼으나 결국 책은 나오지 않았고 원고료도 한 푼 받지 못했다. 졸업을 못했으니 입사시험을 볼 자격도 얻지 못했는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블라인드 채용' 하는 곳이 한 군데 있길래 알아보니 SBS여서 거기 시험을 쳤다. PD가 되었는데 처음 맡은 일이 '영수증 예쁘게 붙이기'였다. 방송국에 들어와 영수증이나 붙이고 살아야 하나, 하고 자조했으나 달마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의 유혹은 컸다. 게다가 영수증 붙이는 일을 오래 하면서 프로그램의 예산안을 짤 수 있는 신공이 생겨버렸다. PD는 아이디어만 내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 전체를 꾸려 나가야 하는데 새끼 PD 때 했던 허드렛일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역시 세상에 쓸데없는 일은 없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얻는다. 《그것이 알고 싶다》와 《관계자 외 출입금지》 같은 교양 프로그램을 제작했고 이번에 『월급쟁이 이피디의 사생활』이라는 책을 펴낸 이동원 PD의 얘기다. 방송국 생활의 시작부터 찌질한 얘기의 연속이다. 졸업도 못한 상태에서 여자친구에게 잘 보이려고 입사하는 바람에 본인의 졸업식에도 못 갈 뻔했는데 선배들이 스케줄을 빼주는 바람에 겨우 참석했다.
책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단숨에 읽힌다. 이동원은 타고난 이야기꾼이거나 가는 데마다 사건을 몰고 다니는 문제적 인간이다. 도대체 한 인간에게서 어떻게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올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책 어디를 펴서 읽어봐도 청산유수요 사건의 연속이다. 본인의 초등학교 중학교 때 얘기조차도 집단 따돌림에서 교장 선생님 자살까지 자극적인 사연이다. 이동원 PD는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정인이 사건'을 세상에 내놓은 사람이다. 양모가 자기 아이를 잔인하게 살해한 그 비정함은 전 국민의 공분을 샀는데 그걸 수면 위로 올려놓은 건 SBS '그알'팀과 전국의 수많은 '분노한 엄마들'이다. 방송이 나간 직후 '정인아 미안해'가 검색어 1위에 오르고 수많은 관계자들로부터 격려와 위로 메시지가 쇄도하자 이동원 PD는 비로소 새벽 두 시에 편집실에서 펑펑 울고 말았다.
그는 잘 나가는 방송국 PD지만 그의 글은 전혀 멋지지 않다. 자신에게 불리한 얘기도 솔직하게 다 쓴다. 인터뷰하기로 한 조폭을 만나는 게 너무 무서워 제발 인터뷰가 최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모습에선 헛웃음이 터지는데, 막상 만난 조폭도 자기 보스보다는 아내가 TV를 보고 자기를 알아볼까 봐 PD와 옷을 바꿔 입자고 하는 공처가라는 면에서는 또 어이가 없을 정도다. 자신은 정말 정의롭지도 않고 겁도 많은 쫄보라고 고백하는 이동원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이 사람도 우리와 다름없는 월급쟁이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직장인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그야말로 가장 재미있는 일을 하며 사는 월급쟁이기 때문이다. 비록 일을 하다 보면 며칠씩 밤을 새우고 먹다 남은 김밥과 탑처럼 쌓인 종이컵 사이에서 한숨을 내쉬게 되지만 그 덕분에 억울함을 풀고 진실을 세상에 내놓아 준 '방송국놈들'에게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 일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책 마지막 에필로그 직전 꼭지 '내가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된다면'에서도 그는 자기 얘기만 하지 않고 제주도에서 살해되었던 정의로운 변호사 이승용 사건을 얘기하는데, 정말 마지막까지 찡하게 하는 진심이 느껴졌다(그 에피소드를 TV로 지켜본 게 생각나서 더 그런 것 같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메인 작가로 오래 일했던 홍익대 뚜라미 후배 장윤정 작가 덕분에 이동원 PD와의 개인적 인연이 생긴 얘기를 해야겠다. 아끼는 후배 이 PD가 박호산 나오는 연극 《무제의 시대》를 보고 배우와 인사도 나누고 싶다고 하길래 장 작가가 우리 부부를 연결해 준 것이다. 우리와 처음 만난 날 함께 연극을 보고 나온 이 PD는 박호산과 인사를 나누었고(박호산 배우는 우리 동네 사는 주민이라 어쩌다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됐다) 이어 언젠가는 자기와 함께 술을 꼭 마셔야 한다고 우겼는데 그 이유가 황당했다. 박호산과 자기의 스마트폰 끝 자리 네 개가 같기 때문에 이건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날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는 입이 딱 벌어졌다. 방송에 미처 나오지 못했던 더 '쎈 얘기'들이 그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 후에 진심이 통했는지 박호산 배우외 만나 구포국수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셨고 나중에 동네 사는 오세혁 작가와도 치킨싸롱에서 왕창 술을 마셨는데 그땐 왜 모였는지 이젠 기억도 안 난다. 아마 내 책을 재밌게 읽었다고 한 사람들끼리 나를 불렀던 것 같다. 뭐 그렇다고 책 얘기를 많이 한 건 아니다.
자신의 일과 에세이가 섞인 장르를 일컫는 '업세이'라는 신조어가 몇 년 전에 나왔는데 내 생각에 이 책이야말로 특급 업세이다. 책을 읽는 동안 촉이 왔다. 아, 이거 베스트셀러는 아니더라도 준 베스트셀러는 되겠구나. 마침 오늘 아침에 저자와 카톡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다음 주에 2쇄를 찍는단다. 역시 눈 밝은 독자들은 좋은 책을 귀신 같이 알아본다. 일독을 권한다. 선물용으로도 좋다. 오늘 아침에 나는 소행성 책쓰기 워크숍 멤버들에게 카톡으로 이 책 영업을 했다. 정말로 이 책은 첫 책을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강추다. 일단 독자를 빨아들이는 글발이 좋으니 얼른 사서 읽어보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