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는 오지 않았지만 박근형이 왔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by 편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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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세계에서 가장 나이 많은 배우들로 구성된 '고도를 기다리며' 팀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런데 87세, 83세 두 배우의 나이듦은 육체적 쇄락뿐 아니라 여유와 완성이라는 선물도 안겨 주었다는 것을 신구, 박근형 두 배우는 깨닫게 해 준다. 특히 구부정하고 좀 마른 듯한 디디 역의 박근형 배우는 활발한 움직임과 대사는 물론 '개 한 마리가 주방에 가서 소세지 하나를 슬쩍 했네'라는 노래에 이르기까지 연극이 지닌 희비극적 요소를 너무나도 잘 표현한다. 구두를 벗기 위해 안간힘 쓰는 첫 장면부터 빛나던 신구 배우의 본능적인 연기는 박근형이라는 든든한 파트너 덕분에 공연 내내 따뜻한 빛의 보호를 받는 느낌이었다.

그에 비하면 젠더 프리로 럭키 역을 맡은 박정자 배우는 너무 기대를 해서였는지 중반 이후 포조의 "생각해!"라는 명령 이후 터져 나오는 기나긴 독백의 에너지가 좀 아쉬웠다. 포조 역의 김학철도 대사 실수가 많았고 더 유머러스하게 허장성세를 보여주는 포조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나는 잠깐씩 등장하지만 소년 역을 맡았던 김리안 배우의 연기에 놀랐다. 정말 소년 같았고 대사가 없는 순간에도 박근형에게 팔을 잡혔을 때와 도망갈 때의 몸짓이며 표정이 아, 이 배우는 이 연극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줘서 흐뭇했다. 10대 소년 같았는데 20대 중반의 여성이라고 해서 그것도 좋았다.


최근 《라스트 세션》 《러브레터》 등으로 호평을 받은 연출가 오경택 작품이다. 러닝타임 150분이었는데 인터미션 시간에 남자화장실에 갔다가 길게 줄을 선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떤 연극이든 여성 관객이 많아서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와 공감을 주는 연극이 아닐까 한다. 낮에 잠깐 누나를 만날 일이 있어 갔다가 저녁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다고 했더니 자기도 크리스마스에 이 연극을 모임 사람들과 함께 보기로 했다고 해서 반가웠다. 객석에서 뮤지션이자 작가인 요조 씨를 만났다. 연극이 끝난 뒤 우리는 신당동 떡볶이 골목에 가서 떡볶이에 맥주를 마시며 연극 얘기를 했다. 아내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그동안 네다섯 번은 본 것 같은데 이번에 박근형이라는 배우 덕에 완전히 새로웠으며 조조와 디디를 부부 관계로 해석해 보면 더 재밌을 것 같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요조 씨는 대학 때 이 연극 대본으로 스터디할 때는 이해되지 않는 대사나 구성의 부조리함에 놀라곤 했는데 이젠 그런 것들이 너무나 다 이해가 되어 신기하면서도 허탈하다고 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동안 쌓아 온 지식과 슬기로 눈이 밝아진다는 면도 있지만 마음 한구석엔 어떤 부조리한 상황도 받아들일 수 있는 체념도 있음을 말하는 것 같았다.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과 연극이 끝나고 이런 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아내는 극장 로비에서 우연히 만난 팬에게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요조 씨의 사진을 떡볶이집에서 뒤늦게 전송해 주며 웃었다.


춥고 바람 부는 언덕 커다란 나무 밑에서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는 두 남자는 왜 그토록 고도를 기다려야 하는 건지 끝내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게 이 연극의 난점이자 매력이다. 연극이 끝나고 나면 그들의 대사가 머릿속에 맴돈다. "자, 가자” “안 돼” “왜?”“고도를 기다려야지” “아, 그렇지!”라는 허무한 대사의 반복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 덧없음을 알려 주면서도 기이한 동지애를 느끼게 해 준다. 고도는 끝내 오지 않았지만 이번에 내겐 박근형이 온 기분이다. 지금 말하는 박근형은 개인 박근형이 아니라 오랜 세월 한 분야에서 축적해 온 기량과 진정성을 마지막까지 당대에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선배들의 대명사다. 멋진 그들의 행보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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