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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Dec 28. 2023

미술관에 갔던 날

제주 여행 이야기 2


아침에 일어났더니 아내가 일찍 드라이브나 하자고 했습니다. 차를 두 번 소유한 적은 있지만 자동차를 좋아하지 않아 곧 팔아버리곤 했던 제게 ‘드라이브’란 생소한 단어였죠. 아내가 가고 싶어 한 곳은 ‘1100고지’였습니다. 운전을 하며 눈 쌓인 도로와 산길을 계속 달리다 보니 과연 여기는 자동차 없이는 올 수 없는 곳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오는 곳이라 아침 일찍 오자고 했다고 합니다. 도로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올라간 산 정상은 그야말로 설국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즐거워하더군요. 비닐종이로 썰매를 타는 아이들도 있었고 눈집게로 오리 인형을 만드는 꼬마도 있었습니다. 아내가 한 꼬마에게 가서 “오리 진짜 잘 만드네. 아줌마에게도 하나 만들어 줄래?”라고 했더니 꼬마는 신이 나서 눈을 꽁꽁 뭉쳐 오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내는 그 오리를 난간에 올려놓고 편의점으로 갔습니다. 저희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편의점’이라 쓰여 있는 가게에 들어가 군고무마를 하나 먹고 나왔습니다.

오전 열한 시에 예약이 되어 있는 식당 <조은기록>에 가서 ‘새참도시락’을 먹었습니다. 저희가 제주 온다는 소식을 듣고 지인인 정희 씨가 예약을 해준 곳으로 음식의 맛과 질이 놀라웠습니다. 정희 씨가 친구들을 데리고 대여섯 번을 갔는데 모두 대만족이었다는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짐작이 갔습니다. 음식은 물론 가게 꾸며놓은 솜씨도 감각이 남달랐습니다. 젊은 부부 셰프였는데 인상도 좋아 한참 수다를 떨다가 “이렇게 된 거, 어차피 TMI이니…” 하며 아내가 낸 책 얘기도 하고 제가 쓴 책들 얘기도 꺼냈습니다. 여성 셰프가 당장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보고 탄성을 지르시더군요. 저는 우리 커플이 연극 리뷰만 쓰는 ‘셰익첵’ 계정도 알려 드렸습니다. 이 분들도 자신의 전직에 대해 얘기하는데 남편인 조판수 셰프는 연극배우 출신이었습니다. 자그마치 국립극단 시즌단원이었다네요. 아내 김은혜 셰프와는 장애인연극의 조감독으로 만났답니다. 그러니까 조판수 셰프는 장애인연극에서 비장애인 배우로 출연을 했던 것이죠. 아내는 “제주에 사는 사람 셋에게 추천할 만한 식당을 물었는데 두 사람이 여길 얘기 했어요.”라고 했고 그중 한 사람이 도자기 공예로 유명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제가 또 참지 못하고 스마트폰으로 ‘나니쇼’를 검색해서 김란영이 바로 이 나니쇼의 주인공이라고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아마 란영이는 2023년 12월 26일 오전 11시 50분경에 귀가 매우 간질간질했을 것입니다.       

나온 김에 미술관에 가보자 해서 제주현대미술관으로 갔습니다. 김흥수 화백과 변시지 화백의 그림들이 상설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김흥수보다 변시지의 힘찬 터치와 외로운 현대인의 초상에 감동했습니다. 젊은 작가로는 로와정(노 씨와 정 씨 두 사람이라 이름이 이렇습니다)의 인문학적 깊이에 흥미가 갔습니다. 배가 좀 고프다는 아내의 요청에 뭔가를 먹을까 하다가 제가 음식을 포장해 가지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더애월’이라는 식당에 가서 김치찌개를 포장해 차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유동룡미술관(이타미준갤러리)에 갔는데 예약제 운영이라 관람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갤러리가 예약제라는 것도 모르고 오는 무식쟁이들이었던 것입니다. 아내는 네이버로 예약을 하러 들어갔다가 일인 당 3만 원이라는 티켓값에 놀라워했습니다. 그러면서도 3만 원이나 하는 이유가 다 있겠지, 하고 예약을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너무 피곤하니 좀 누워 있자고 했습니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잠은 오지 않고 이런저런 걱정거리가 밀려오길래 다시 벌떡 일어나 칼럼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제 대신 침대에 누워 칼럼 쓰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고 물었습니다. 출출하니 빨리 김치찌개에 밥을 먹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물론 한 시간 반이 걸렸습니다. 이번 칼럼엔 제주 내려와서 방전된 렌터카 이야기를 썼습니다. 칼럼 다 썼다고 외치니 아내가 나와서 상을 차렸습니다. 김치찌개에 밥을 배불리 먹느라 소주를 마시지 못하는 기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기뻐하며 남은 소주 반 병을 따라버리고 저녁 산책을 나갔습니다. 철 지난 곽지해수욕장은 쓸쓸하더군요. 집으로 들어와 소설을 좀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밤 11시에 걸려 온 전화 때문에 아내가 화를 냈습니다. 뭐 이런저런 일이 다 많지요. 사는 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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