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Dec 28. 2023

산 사람도 만나고 죽은 이도 만나고

제주 여행 이야기 3

여행을 한다는 것은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말이고 낯선 곳에서 안 하던 일을 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제주는 비행기나 배를 타고 와야만 접근이 가능한 곳이므로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뭔가 다른 느낌입니다. 한마디로 기분이 다르다는 이야기죠. 이번 여행은 집을 바꿔 생활해 보는 것 말고도 운전을 오래 하는 경험, 술집에서 물만 마시다 집에 오는 경험, 눈 쌓인 산길을 아내와 함께 걷는 경험 등을 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제주에 있는 미술관에 간 일인 것 같습니다.


그제 예약을 안 하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했던 저지리의 <유동룡 이타미 준 미술관>에 어제 다시 갔습니다. 아내가 전날 네이버에 들어가 예약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저희는 관람 첫 타임인 오전 10시 예약자였는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문 앞에 서 있더군요. 미술관에서는 기본적인 자료와 티켓 등을 넣을 수 있는 파우치를 하나씩 나눠 주었습니다. 입장료 3만 원에 걸맞은 세심한 배려라 생각했습니다.


유동룡은 일제강점기에 미술학교 입학하기 위해 이름을 이타미 준으로 바꿔야 했습니다. 미술과 책을 사랑하던 그는 건축가가 되었는데 누구보다도 자연을 사랑해서 건축물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꿈꾸었고 그걸 설계 기술과 건축자재로 이루어 놓은 인물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탑과 상업 건물, 호텔 등이 있었지만 저는 특히 벚나무와 건물이 어우러진 건물에 대한 메모 중 ‘차마 벚나무 두 그루를 잘라낼 수 없어서’라고 쓴 부분이 강렬하게 다가왔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오디오 도슨트 서비스 덕분에 알 수 있었는데 이 미술관은 문소리, 정우성 등 셀럽들을 도스트로 채용해서 친근함을 높였습니다. 우리는 아주 천천히 작품마다 플레이되는 설명을 들으며 전시장을 걸었고 로비로 나와 제공된 차를 마시며 이타미 준에 대한 책들을 들춰 보았습니다. 전시장 안에서는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어서 밖으로 나와 비로소 책에 있는 작품 사진들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미술관 밖으로 나온 아내는 서울에 사는 정옥 씨에게 전화를 해서 “제주에 한 번도 안 왔다고 하는 정옥 씨는 이타미 준 전시를 보기 위해서라도 꼭 제주에 와야 한다.”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정옥 씨는 이타미 준을 정말 좋아할 것 같다’는 아내의 얘기를 듣고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자 아내는 “안 가르쳐 주겠다.”라고 대답을 해서 정옥 씨와 저를 웃겼습니다.

대정에 사는 도보명상 치유가 강보식 선생을 만나러 갔습니다. 만나자마자 보리밥집 ‘보리타작’에 가서 맛있는 보리밥을 먹고 강 선생과 친구들이 함께 세운 ‘선 명상 센터’로 갔습니다. 가는 길에 아내가 15,6년 전 모슬포에서 게스트하우스 런칭을 도와주며 지내던 시절 얘기를 하자 강보식 선생도 그때쯤 제주로 내려와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이야기를 했습니다. 햇살이 따뜻하게 들어오는 명상센터는 너무 편안하고 아득하더군요. 건물 밖엔 널찍한 마루도 있었고요. 김탁환 선생이 오자마자 여기서 북토크를 하지고 제안한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아내가 커피를 마시며 강보식 선생이 쓰고 있는 책 원고에 대한 아이디어를 몇 개 제안하자 선생이 너무 기뻐하시며 윤혜자 선생과 편성준 선생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보내 준 선물 같은 존재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요즘 저희들에게 아주 좋은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배우 이선균 씨의 죽음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내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선균을 죽인 것인지도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잘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새삼 했습니다. 커피를 마시고 송악산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춥던 날씨가 갑자기 풀려 우리는 옷을 벗고 둘레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다시 차 안에서 강보식 선생이 들려주는 사주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게 들었고 간단하게 아내의 사주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같은 사주라도 인문학적 소양이 있는 사람에게 듣는 사주풀이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저녁엔 제주에 내려와 사는 란영과 우동 씨 부부에게 갔습니다. 아내가 서울에서 파스타면을 가져와 간단하게 요리를 해주기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동 씨는 우리가 온다고 아침에 나가 무늬오징어를 잡아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파스타와 무늬오징어를 먹으며 결혼에 대한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일기를 쓴 뒤 맞춤검 검사를 위해 브런치에 원고를 먼저 올려보는 편인데 며칠 전에 란영과 우동 씨에게 갈 것이라는 내용을 썼더니 우동이라는 단어가 맞춤법 오류 의심 단어로 지정되었고 우동을 ‘가락국수’로 변경하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했더니 우동 씨가 껄껄 웃었습니다.

결혼과 인생, 앞으로의 건강 문제 등을 얘기하다가 안녕을 고하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란영 집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그냥 자기는 좀 허전하다는 생각에 편의점에 들러 화요 두 병과 번데기통조림을 사가지고 왔습니다. 아내가 양배추와 번데기를 넣고 끓였더니 아주 훌륭한 안주가 되었습니다. 화요 두 병을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양치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 일곱 시까지 푹 잤습니다.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내용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미술관에 갔던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