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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본과 연기 모두 좋았던 연극

즉각반응의 《무라》

by 편성준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가 해장국을 사준다. 아버지는 자꾸 집을 나간다.

어떻게 알고 왔노? 왜 그렇게 집을 나가서 노숙을 하십니까?

여는 관 속 같아서 답답해. 밖이 좋다. 밝고, 환하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같이 여행을 떠나자고 권한다. 내 인생에 여행도 있나.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아버지는 아들과 여행을 떠나 고향으로 가고 아내를 처음 만난 곳도 찾아간다. 힘차게 일하던 시절도 있고 서로의 반목에 괴로워하던 나날도 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사람들은 다 가슴에 저마다 품은 슬픔들이 있다.

2023년 마지막 날인 어제저녁에 본 연극 《무라》는 아버지와 아들 간엔 아무것도 없어서 '無라'라고 한 것 같기도 하고 밥 많이 먹으라는 경상도 사투리 같기도 하다. 어쩌면 희곡을 쓰고 연출까지 한 하수민이 자신에게 하는 얘기인지도 모른다. 세상 사는 게 다 부질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살아봐야 하지 않겠나.


극본을 너무 잘 썼다는 생각을 하면서 보았다. 부자간에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닌데 남성 딱 둘만 출연하는 2인극이니 그 어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그런데도 이걸 해낼 수 있었던 건 극본의 힘과 더불어 김홍파 배우와 서동갑 배우의 연기 덕분이다. 특히 김홍파 배우의 힘찬 아우라는 관객을 압도한다. 최근 연극을 보면서 게으르고 태만하게 대사를 틀리던 선배 연기자들 때문에 혀를 끌끌 찰 때가 많았는데 최근 박근형과 김홍파 두 배우가 그런 이미지를 날려 주었다. 두 사람이 찾아간 집에서 술을 받아 마시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저쪽으로 가서 혼자 술을 마시고 아들은 그냥 앉아 껄껄 웃는 장면이 정말 놀라웠다. 술잔도 없고 앞에 사람도 없는데도 혼자 흐드러지게 웃어대는 서동갑의 연기는 눈이 부시도록 슬펐다.


마지막 샤워씬도 기억할 만하다. 따뜻한 물줄기를 받으며(물론 물은 없다) 두 사람이 모든 걸 털어버리고 각자의 길을 가려는 마음이 잘 느껴졌으며 김홍파 배우의 처진 엉덩이는 그것 자체가 말 없는 웅변이었다. 서동갑 배우는 지난가을 춘천에서 박근형 작가의 《경숙이 경숙아버지》를 보고 뒤풀이 자리에서 인사를 나누고 술도 같이 마셨던 배우다. 극이 끝나고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관객에게 인사를 하는 서동갑을 따뜻하게 포옹하던 김홍파의 모습이 너무 좋았다.


극장 안에서 임세미 배우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와 수다를 떨었다. 세미 씨는 서동갑 배우와 함께 달리기도 하고 플로깅도 하는 친한 사이이고 김홍파 배우와도 얼마 전 드라마를 같이 한 사이이므로 이 연극을 꼭 보고 싶었는데 스케줄이 안 맞아 세 번이나 연기를 했다고 한다. 그래도 기어이 마지막 날 보게 되어 다행이라고 웃는 세미 씨가 아름다워 보였다. 두 배우에게 술을 한 병씩 선물한 세미 씨가 한 병을 더 내밀었다. 그건 아내와 나를 위한 선물이라고 해서 꺼내보니 33도짜리 프리미엄 증류주였다. 김홍파 배우에게도 잘 보았다고 인사를 드렸고 두 배우와 세미 씨까지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헤어졌다. 좋은 연극 한 편 덕에 따뜻한 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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