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성의 『지구에 처음 온 사람처럼』
어제 양희은·양희경 선생의 어머니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낮에 갔는데도 많은 문상객들이 오셨고 화환도 많았다. 문상을 하며 절을 할 때 양희은 선생이 우리를 보고 "팬이에요."라고 말씀해 주셨다. 놀랍고 고마운 일이었다. 아내와 나는 배가 고팠던 터라 밥과 장국을 허겁지겁 먹고 생선전과 동그랑땡, 떡까지 몽땅 집어먹은 뒤 이거, 상가에 와서 너무 먹은 게 아닌가 무안해하며 얼굴을 붉혔다. 장례식장 한쪽 벽에는 화환을 보낸 분들의 띠가 스테이플러로 주르륵 박혀 있었다.
가수 최백호 선생이 인사동에서 틈틈이 그렸던 그림을 모아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연 적이 있었다고 한다. 전시를 축하한다는 내용의 수많은 화환 속에 유독 눈에 띄는 문구가 있었으니 극작가이자 작사가인 양인자 선생이 보낸 '최백호 씨, 정말 근사한 일이네요'였다. 개그맨 전유성 선생은 그걸 보고 머릿속에 박하사탕 향이 싸하게 번지는 걸 느꼈다. 그다음부터 나도 화환을 보낼 때는 다르게 적어보자고 결심했다. 그 무렵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전유성은 화환의 띠에다 '너네 어머니 오이지 참 맛있었는데'라고 적어 보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문구는 기억 못 해도 이걸 기억 못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유성 선생이 쓴 새 책 『지구에 처음 온 사람처럼』에 나오는 얘기다.
장례식장이 슬프기만 한 건 아니다. 거기서 새로운 생각이 탄생하기도 한다. 어느 영화감독이 한 가수의 장례식장에 가서 죽은 이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을 보고 이런 영정사진도 있구나 생각했다. 그 영화감독은 허진호였고 죽은 가수는 김광석이었다. 한석규가 활짝 웃고 있는 영정사진이 나오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그 영화 이후 웃고 있는 영정사진이 많아졌다고 한다. 소행성 책 쓰기 워크숍에 와서 죽음학에 대한 책의 원고를 쓴 원현정 선생도 마찬가지다. 그분이 쓴 원고의 내용은 '죽음을 저녁 식탁에 올리자'였다. 너무 신선한 발상 아닌가.
아침에 일어나 책꽂이에서 전유성 선생이 보내주신 『지구에 처음 온 사람처럼』을 뒤적이다가 어제 장례식장과 겹치는 아이디어가 있길래 잊기 전에 써 놔야지 하고 얼른 적었다. 가벼운 책이라 생각했는데도 역시 읽어보니 깊은 내공이 느껴진다. 책을 덮다가 띠지를 보니 "오랜만에 낄낄대며 단숨에 읽었다."라는 양희은 선생의 추천사가 보였다. 역시. 아이디어는 어디에나 있다. 러브 이즈 인 디 에어, 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아이디어 이즈 에브리웨어.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머릿속에 상쾌한 바람이 필요할 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