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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아니면 절대로 경험하지 못할 신세계

연극 <언덕의 바리>

by 편성준

사건·사고 전문 작가라는 별명이 있는 고연옥 작가가 서대문 형무소의 자료를 뒤져 찾아낸 이가 바로 ‘여자폭탄범 안경신’이다. 고연옥은 왜 일제강점기에 만삭의 몸으로 폭탄을 두르고 평양경찰서로 돌진한 여성에게서 '바리' 신화를 떠올렸을까. 안경신이야말로 3.1 운동 때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죽어 간 영혼들의 죽음을 결코 저버리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언덕의 바리인가. 언덕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중간지대로서 폭탄 테러에 실패하고 도주한 안경신이 영양실조로 눈이 먼 아들을 다시 만나기에 적당한 장소가 바로 이 언덕이라서다. 안희연의 시 '여름언덕에서 배운 것'을 읽은 고연옥은 저 푸른 언덕 위에서 안경신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고 상상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 방랑하는 무사의 이야기를 영웅신화로 만든 <칼집 속의 아버지>에서 보았듯 고연옥은 이렇게 신화적 극본을 만드는 데 탁월하다.


김정 연출은 여기에 '신체 연극'이라는 개념을 가져왔다. 배우들의 신체 움직임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서 인물의 심리나 상태, 감정을 구현하는 장르인 신체 연극은 극본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극의 본질적 분위기만 전달하기도 하는데, 배우들은 죽을 맛이겠지만 관객들은 신이 난다. 경신 역의 김문희 배우는 등 굽은 할머니로 등장해 서서히 젊은 경신으로 변할 때부터 존재감 쩌는 연기를 펼친다. 이는 김정아, 최태용, 강세웅 등 등장하는 모든 배우가 다 그렇다. 나는 특히 경신과 명희가 계속 하나의 외투를 빼앗아 입으며 대사를 치는 장면에서 뒤로 넘어갔다. 저 동작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까. 궁금한 사람들은 얼른 예매를 하시라. 아내와 나는 류혜린 배우의 팬인데 작고 가냘픈 류혜린 배우가 최태용 배우의 몸에 다리를 착 감고 매달릴 땐 그 모습이 안타깝고도 귀여워서 한참을 웃었다.


《이 불안한 집》에서 말러의 교향곡으로 관객을 전율케 했던 김정 연출은 이번 작품에서도 음악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음악과 신체의 움직임뿐 아니라 길게 늘이고 높게 외치는 대사의 톤도 그리스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건 연극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절대로 경험하지 못하는 신세계다. 한 마디로 작가와 연출의 확신에 찬 에너지로 똘똘 뭉친 연극이다. 이들의 야심은 첫날부터 '전석 매진'이라는 관객의 화답으로 인정받았다. 프로젝트 이름이 재밌다. 프로젝트 내친김에의 <언덕의 바리>는 2023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연극인데 어제인 2024년 1월 6일부터 14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한다. 고연옥 작가와 김정 연출의 만남이라는 것만으로도 필견의 가치다. 그나저나 단테가 얘기한 이승과 지옥의 경계선이 연옥인데 이승도 저승도 아닌 중간지대 언덕에서 바리를 만나게 하는 작가의 이름 또한 연옥 아닌가. 신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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