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호의 『슬픔의 방문』 북토크 후기
작년 초에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장일호의 에세이 『슬픔의 방문』이었다. 책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인용의 향연을 보며 《시사인》 기자인 저자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알 수 있었고 가난, 차별, 성폭력, 여성, 젠더, 가족, 항암 등의 키워드를 하나하나 꼽아보면 어떻게 이렇게 솔직하고 용감하게 쓸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놀라게 된다. 나는 당시 강의를 나가던 대학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읽다가 나도 모르게 만년필로 밑줄을 긋는 바람에 도서관 직원에게 야단을 맞았다. 풀이 죽어 변상을 하겠다고 조그맣게 말했더니 몇 줄 정도는 봐준다고 하면서 훈방 조치해 주었다.
어제 이화동에 있는 북카페 《책 읽는 고양이》에서 열린 '슬픔의 방문 북토크'에 참석했다. 아내는 목감기에 걸려 으슬으슬 춥다면서도 예약을 해놨으니 가자고 했다. 나도 원래는 근력학교에 가서 운동을 하는 날이었는데 북토크 때문에 날짜를 변경했다. 진작부터 노리고 있었던 장일호 기자의 북토크를 몇 번 놓쳤기에 이번엔 꼭 참석하고 싶었던 것이다.
저녁 7시가 되자 카페 주인인 소설가 조선희 선생이 "작년에 자신에게 강펀치를 날린 책의 저자가 바로 장일호 씨였다."라면서 행사 시작을 알리고 작가를 소개했다. 장일호 기자는 예상보다 활달하고 명랑·쾌활했다. 책 제목에 '슬픔'이 들어 있어서 굉장히 차분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깨졌고 거기에 '회의든 북토크든 중구난방으로 하는 게 제일 좋더라'라는 조선희 선생의 유쾌한 첨언까지 있어서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장일호 기자는 "저기 서 있는 사람이 제 동거인이에요."이라며 남편을 소개했고 서른 명 넘게 '노쇼' 없이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는 책을 쓰고 난 이후에도 계속 직장에 다니고 있으며(시사인 유튜브 팀장이란다) 항암도 5년째라서 많이 나아졌다는 근황을 전했다.
시작 직전에 나를 알아보고 '편성준 작가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해서 깜짝 놀랐다. 나는 손을 들고 첫 질문자로 나섰다. 최근에 읽은 책 중 인상 깊은 솔직함의 첫 번째는 아내와 어머니 사이 얘기를 책에 쓴 장강명 작가였고 두 번째는 '그래도 가족인데'라는 소리를 듣고 "예, 압니다."라고 얘기한 황정은 작가, 그리고 눈 밑의 눈물점을 뺐으면 좋겠다는 시어머니에게 "제 몸이니까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말한 장일호 작가가 세 번째였는데 장 작가가 제일 셌다고 말했다. '슬픔의 방문'에서 방문의 의미를 'visiting' 말고 '널리 알림'으로 해석한 적도 있던데 제목은 누가 지었느냐고 물었더니 편집자의 솜씨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장일호 작가로서는 당시에 썩 마음에 드는 제목이 아니었지만 첫 책을 내는 작가답게 '출판사에 피해만 끼치지 말자'라는 마음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고는 자신이 썼지만 책에 대해서는 작가보다 편집자가 더 많이 생각을 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는데, 역시 그 생각이 맞았다. 책이 대박이 난 것이다. 목걸이를 한 여성 그림인 표지도 책을 도드라지게 하는 데 한몫을 했다(책날개에 손정민 작가의 작품이라는 설명이 들어 있다).
조선희 선생은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어서 독후감도 천차만별이라는 얘기를 하며 "책은 한 권인데 여러 개의 구덩이가 있어서"라고 말했다. 어떤 분은 아침 10시 출근 얘기가 인상 깊은 구덩이였다 했고 어떤 독자는 엄마에 대해 쓴 이야기를 읽고 자신의 엄마도 그랬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 구덩이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장일호 작가는 "솔직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사실은 다 쓰지 않았습니다."라고 밝히며 하지만 10시 출근 에피소드 등은 솔직하게 말하는 게 그렇지 않은 것보다 낫다는 신념으로 썼다고 말했다. 글을 쓰고 교정지 상태로 자신의 글을 점검할 때 신경 쓰는 건 오로지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가'만 본다는 것이다. 책을 내고서 엄마와 대화를 나누게 되어 기뻤다고 말도 좋았지만 며느리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서 '지금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읽고 있다'라고 보내온 시어머니의 문자 메시지는 차라리 감동이었다('스밀라...'는 작가가 책 맨 앞에 인용한 페터 회의 소설이었다).
장일호 기자가 단골 카페에서 지인들만 불러 결혼식을 했던 에피소드를 거론하며 자신이 서촌에 있는 그 가게 단골이라 밝힌 독자 얘기도 재밌었고 장례식을 살아 있을 때 미리 하는 아이디어도 신박하다며 박재희 선생이 감탄했다( '독하다 토요일' 멤버인 박재희 선생을 행사장에서 우연히 만나 너무나 반가워했다). 샤이니 종현 이야기를 써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분도 있었고 '내가 몰랐던 엄마에 대해 알게 해 줘서 고맙다"라고 말한 30대 독자도 있었다. 책에 포스트잇 견출지를 정말 많이 붙이고 카메라를 든 독자도 잊을 수 없었다. 낙태법에 대한 의견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다는 분도 있었다. 장일호 개인의 이야기들은 책으로 쓰임으로써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비참함과 우아함이 포개져 있는 한 인생의 생생함'이라 이번 북토크를 정의한 조선희 선생의 로그라인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조선희 선생은 기본으로 제공되는 음료와 맥주는 물론이고 카운터에 준비된 연태고량주는 무제한이니 얼마든지 가져다 드시라고 말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술이 연태고량주인데 주량이 반 병이라는 게 함정이라고 했다.
북토크에 다니는 독자 중엔 "왜 작가들은 다들 글을 쓰라고 하지?"라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글쓰기는 정말 자신을 잘 알 수 있는 방법이며, 정말 좋은 거니까 권하는 거다, 라고 장일호 기자는 간절하게 말했다. 자신은 누군가의 시도를 보고 '변화가 없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싫다고 했다. 우리는 분명, 조금씩이라도 변하고 있음을 믿는다고 했다. 다만 완전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어떤 독자는 "장일호의 책이 새로운 세계로 가는 지도를 열어주고 있더라"라고 화답했다. 뾰족한 마음은 사라지고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격려하는 마음만 남아서 행복한 시공간이었다. 장일호 작가는 마지막으로 고명재 시인이 쓴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에서 자신을 키워준 비구니와 시장에 갔던 시인의 이야기를 읽어 주었다. "이런 걸 사는 게 부처님의 마법이란다."라는 부분을 낭독하는 장일호의 목소리는 정말로 마법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