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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의 별이 더 빛나 보이는 이유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리뷰

by 편성준


만약 12살에 처음 만난 나영과 해성이 이민으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되거나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애틋한 이야기였다면 조금은 실망했을 것이다. 다행히 셀린송은 그러지 않았다. 12년 만에 스카이프를 통해 다시 서로를 알아보고 이야기를 시작한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지지만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의심한다. 이게 과연 사랑일까. 혹시 일시적인 감정은 아닐까. '메타인지'의 뜻이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 영화는 메타인지를 이용해 뻔한 스토리 라인을 벗어나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사랑의 감성은 인생의 어느 시기엔 그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힘으로 이성을 제압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유치하거나 어리석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어긋난 사랑이 못내 아쉬운 나영(그레타 리)은 '인연'이라는 동양의 오래된 개념을 적용해 두 사람의 불운을 합리화한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열두 살의 나와 다른 나'이고 '서울에는 내가 열두 살 때 두고 온 나'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패럴렐 월드까지 가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의 운명이라는 건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고 타이밍은 툭하면 어긋나기 마련이니 우리는 인연이나 전생(past lives) 같은 개념을 알리바이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셀린송이 아카데미 수상을 하진 못했지만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개인적으로는 <미나리>보다 몇 배 더 잘 만든 영화라 생각함). 영화 도입부의 빌드업은 좀 지루했지만 캐나다 여행 출국 심사대의 몇 마디 대사로 나영과 아서(존 마가로)가 부부임을 나타내는 장면도 재치 있었고 '노벨상-풀리처상-토니상' 순으로 해성(유태오)이 나영의 욕망의 좌표를 짐작하는 대사도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첫 장면 새벽의 바에서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던 나영·해성·아서 세 사람의 삼각형에 치졸함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들었고 그레타 리나 유태오, 존 마가로의 연기도 고르게 좋았다. 특히 유태오의 매력이 돋보였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것보다는 예전에 놓치거나 어긋난 게 더 빛나 보이는 게 인지상정이다. 별이 멀리 있기에 빛나 보이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나 할까. 셀린송의 연출력은 마지막에 한 번 더 빛을 발한다. 해성이 타고 갈 우버택시를 함께 기다리다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영의 집 앞 계단 밑에 남편 아서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늘 이어폰을 끼고 뭔가 보다가 무심하게 아내를 맞이하던 그였다. 그러니 마지막에 나영이 남편에게 안겨 눈물을 터뜨리는 것은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 아름다움에 대한 백색 한숨이라고 해두자. 그녀의 눈물이 그렇게 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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