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읽은 정용준의 단편집 『선릉 산책』
일요일 새벽에 갑자기 눈이 떠졌다. 전날 너무 일찍 잤던 것이다. 한 다섯 시 반쯤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웬걸, 세 시 반이었다. 회사를 다닐 때라면 그저 화장실에 가서 소변이나 보고 다시 침대로 기어 들어갔겠지만 이젠 아침에 출근할 필요가 없으니 바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마루로 나가 책꽂이를 둘러보다가 정용준의 단편집 『선릉 산책』 을 꺼내 펼쳤다. 예전에 샀는데 그때 심란하고 바쁜 일들이 겹쳐 일어나는 중이었기에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펼쳐 찬찬히 읽어보니 귀엽고 좋다. 역시 새벽에 읽는 책 맛이 최고다. 여러분, 작가가 되면 새벽에 일어나서 소설책 읽을 수 있어요. 네, 안 부러운 거 다 압니다.
표제작 「선릉 산책」은 자폐 증상이 있는 스무 살 청년을 갑자기 떠맡아 대낮에 선릉 근처에서 산책을 시켜야 하는 어느 백수 남자의 이야기다 '시급 1만 원'이라는 선배의 꼬드김에 덜컥 일을 대신 맡았지만 자폐아 청년은 헤드기어를 쓰고 걸어 다니는 것도 황당한데 아무 데나 침을 뱉는 버릇까지 있다. 조금 서글프고 쓸쓸한 소설이다.
두 번째로 선택한 소설은 「미스터 심플」이다. 내 취향에 딱 맞는 소설이다. 주인공이 '당근 거래를' 위해 빨래방에 간다. 판매자가 야밤도 괜찮다고 하면서 빨래방 앞에서 만나자고 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당근 거래를 하며 빨래도 해결할 생각으로 빨랫감을 들고나간다. 빨래방에서는 책도 잘 읽히고 글도 잘 써진다는 주인공의 말에 공감한다. 그런데 당근 거래자도 빨랫감을 들고 왔다. 주인공은 번역 원고를 꺼내 놓고 좀 쓰다가 원고에 대해 아는 척을 하는 거래자와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가 왜 클래식 기타를 싼 가격에 처분하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인생의 슬픔과 시간이 가진 잔인함을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다. 글쓰기 얘기가 나오고 비 오는 날 결혼하면 잘 산다는 말이 헛소리라는 얘기도 나온다.
주인공은 호른 연주자인데 그가 마지막에 연주라는 곡이 'Danny Boy'다. 며칠 후 나는 이 곡을 대학로의 갤러리에 거서 김호 작가의 피아노 연주로 또 듣게 된다. 이상한 인연은 인생을 재밌게 만든다. 나는 그날 김호 작가에게 "더스틴 호프만, 숀 코너리, 매츄 브로데릭이 나오는 《패밀리 비즈니스》라는 영화 맨 마지막에 대니 보이가 나와요."라고 말했다. 얘기하면서 이 노래에 대한 얘기를 최근에도 들은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정용준의 소설이었다. 회사를 안 다니면 할 수 있는 일들,이라고 제목을 써왔는데 생각해 보니 이건 회사와 상관없는 일들인 것 같다. 아무튼, 정용준 작가의 소설이 좋다는 얘기를 좀 길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