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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이 거의 다 한 연극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by 편성준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사진, 동영상 촬영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커튼콜 촬영도 불가합니다. 시작 전 무대를 찍은 사진이 있다면 그것도 지금 지워주시기 바랍니다."

대학로 예그린씨어터 직원의 안내 멘트는 엄격했다. 관객은 배우나 무대 사진을 집으로 가져갈 수 없었다. 연극을 보면서 리뷰 쓸 생각을 동시에 하는 나는 '이번엔 사진이나 그림 없이 글로만 연극의 분위기와 컨셉을 전해야겠구나'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객석에 앉아 있었다.


어제 본 연극은 아르헨티나 작가 마누엘 푸익이 1976년 쓴 소설은 원작으로 한 《거미여인의 키스》였다. 영화나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는데 연극으로는 국내에서 2011년 초연 후 올해 네 번째 시즌을 맞았다. 제작사가 배포한 리플렛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자신을 여성이라고 믿으며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성소수자 몰리나와 사랑보다는 정치적 신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상범 발렌틴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감방에서 함께 지내며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퀴어물인 동시에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발렌틴은 반란군 동료들의 거처를 대라는 검찰의 요구에 반항하느라 모진 고문을 당했고 결국 다리를 절뚝거리는 신세가 된다. 검찰은 이 독한 사상범에게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들어온 게이 몰리나를 붙여준다. 그를 어떤 식으로든 꼬드겨 비밀을 알아내면 아픈 어머니를 돌볼 수 있도록 조기 석방을 해주겠다는 조건이다. 몰리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어머니와의 면회를 핑계로 감방 측과 긴밀히 소통한다(정작 그의 어머니는 아파서 면회를 올 수 없다).


하지만 서로를 반목하던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몰리나는 어느덧 발렌틴을 사랑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입된 몰리나는 어느덧 발렌틴의 비밀을 애써 피해야 하는 신세가 된다. 혹시라도 고문을 당하면 그 비밀을 누설하게 될까 봐 아예 듣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는 발렌틴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영화 이야기를 지어낸다. 그렇게 매일 밤 이어지는 '표범여인의 이야기'는 현대판 아리비안 나이트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몰리나 역을 맡은 전박찬은 너무 과하지 않게 그러나 간절하게 성소수자 역을 잘 소화해 낸다. 다른 작품에서도 느꼈지만 이 배우는 특히 딕션이 좋다. 발렌틴 역의 차선우는 아이돌 출신인데 다소 저음이라 처음엔 좀 불안했지만 갈수록 연기에 물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감옥에서도 틈만 나면 공부를 할 정도로 이상적이고 고뇌에 가득 찬 확신범을 연기하기에는 지나치게 잘생긴 느낌도 있다. 두 사람의 열연으로 꽉 찬 110분의 무대였다. 그런데 두 배우의 힘찬 연기에 비해 연출은 너무나 조심스럽다. 스토리는 긴장과 이완에 의해 흘러가는데 이 연극엔 이완이 빠져 있다. 힘을 빼주는 유머 코드도 없고 덜 중요한 장면도 없고 하다못해 무대 전환도 없다 보니 배우도 힘들고 관객도 힘들다. 더구나 객석의 의자는 조금만 몸을 틀어도 끼익끼익 소리가 나서 괴로웠다.


이 연극은 마지막에 몰리나가 석방된 다음 두 사람에게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큰 아픔과 감동을 준다. 동시에 성소수자나 정치적 확신범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전박찬 배우는 지난 2일 열린 프레스콜에서 “단순히 성소수자와 정치사상범의 로맨스가 아니라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혐오와 차별, 억압 그리고 우리 역사의 운동과 관련 있는 작품”이라고도 밝혔고 박제영 연출도 “다수의 편견으로 소수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일은 우리의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다”면서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이 사랑하고 베풀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연출이 좀 더 과감하거나 관객친화적이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는다. 물론 원작이 보여주는 스토리 설정의 탁월함, 정치적 올바름, 그리고 전박찬과 차선우 두 사람만의 열연으로도 충분히 추천하고 싶은 연극이다. 3월 31일까지 예그린씨어터에서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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