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의 『밝은 밤』
박하영 부원장에게 카톡 메시지로 헤어컷 예약을 했습니다. 이 분은 저희 커플이 성수동 살 때 ‘사이’ 파티에서 처음 만났는데 이젠 청담동 ‘빗앤붓’의 부원장님이 되었죠. 저희 두 사람의 머리를 만진 지 십 년이 넘었다는 얘기입니다. 작년에 결혼도 했고요. 머리를 깎으러 가서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일상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동네에 새로 생긴 로바다야끼 갔던 얘기를 했더니 박하영 선생도 남편과 들렀던 논현동의 술집 얘기를 꺼냈습니다. 음식은 그런대로 깔끔한 편이었는데 서빙을 마친 주인 아주머니가 자기 자리에 앉아 전자담배를 피우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집은 우연히 한 번은 가도 다시는 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황당합니다. 매장 안에서 주인이 담배를 피우다니요.
음식점과 술집 이야기 등을 나누다가 “이탈리아에서는 지방선거일 당일엔 모든 가게에서 술을 팔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해 놓은 지역이 있대요. 흥분한 사람들이 싸우지 못하도록.”이라고 했더니 박하영 선생과 옆에서 돕던 어시스턴트 디자이너도 신기하고 재밌는 법이라며 웃었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에서 읽었다고 했습니다.
헤어스타일을 완성하고 샴푸를 하러 샴프실로 갔습니다. 어시스턴트 디자이너가 자신도 어렸을 때 책 읽는 걸 좋아했는지 요즘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통 못 읽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제가 작가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지 계속 책 얘기를 꺼냈습니다.
“전 소설을 좋아했어요.”
“그래요? 요즘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소설 정말 잘 쓰는데.”
“그래요?”
“그럼요. 진짜 잘 써요.”
“그럼 추천 좀 해주세요.”
“아, 갑자기 추천을 하라니.”
“죄송해요.”
“아니에요. 최은영의 <밝은 밤>이라는 장편을 읽어 보세요. 진짜 좋아요.”
“밝은 밤이요?”
“네.”
나는 머리에 샴푸 거품을 잔뜩 묻힌 채 최은영 작가의 첫 장편 『밝은 밤』이 얼마나 좋은 소설인지에 대해 썰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밝은 밤'은 서른두 살에 이혼을 하고 희령이라는 동쪽 도시로 내려간 지연이라는 여자가 그곳에서 친할머니 영옥을 우연히 만나 가까워지면서 할머니의 엄마인 백정의 딸 삼천이(증조할머니)와 아버지 박희수, 그리고 개성에서 이웃집에 살았던 '새비' 아주머니 아저씨 얘기까지,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에 대해 듣게 되는 장편소설이다, 피란 갈 때 새비네와 증조할머니가 울면서 헤어지는 장면, 명숙 할머니가 보내온 편지의 사연 등은 너무나 슬프다…….라고 얘기하고 싶었으나 못하고 그냥 ‘이혼한 젊은 여자로부터 시작해 그 집안 4대에 걸친 여러 사연들이 등장하고 6.25가 배경으로 깔리는 등 스케일도 큰 작품인데 너무 잘 썼다’라고 중구난방으로 소개를 했습니다.
미장원에 와서 소설책 소개를 하다니 너무 ‘밥맛’으로 여기면 어떡하나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번 나온 이야기를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빗앤붓’엔 한 달에 한 번 정도 가니까 다음에 가면 책이 어땠는지 그 어시스턴트에게 꼭 물어봐야겠습니다. 재밌게 잘 읽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가장 좋겠지만 바빠서 못 읽었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 ‘이 자식은 뭐지? 그냥 인사치레로 대답한 건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아, 그리도 이게 얼마나 좋은 소설인데. 소설은 좋아도 제가 너무 주책을 부린 건 아닌지 좀 걱정되긴 합니다. 그렇게 소개하고 싶은 책이 있으면 입으로 떠들지 말고 차라리 책으로 써보라는 신의 계시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