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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도중 박수가 세 번이나 터져 나온 연극

연극 《아트》

by 편성준

예전 농담 중에 '흰 눈 위에 흰색 사슴이 뛰어다니는 그림'이라는 게 있었다. 그냥 백지를 두고 하는 농간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와 똑같은 발상으로 만들어진 연극이 있다. 프랑스 여성 작가 야스미나 레자(Yasmina Reza)가 1994년에 쓴 연극 《아트》다. 아내와 나는 이필모, 박호산, 엄기준 캐스팅으로 봤는데 세 사람의 연기의 합이 기가 막혔고 특히 이반 역을 한 박호산의 열띤 코믹 연기에 박수가 두 번이나 터져 나왔다. 이전부터 이 연극에서 세르주 역을 여러 번 맡았던 엄기준도 너무나 능숙한 연기를 펼쳤다.

스포일러라고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겠다. 이 연극은 최근 '미술품'이라는 호사스러운 취미에 빠진 세르주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캔버스를 5억 원에 구입함으로써 친구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얘기다. 물론 경제적으로 나쁘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얀색 판때기'에 5억을 쓰는 건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 절친 마크의 불만이고 중간에서 두 사람 관계를 깨지지 않게 하고 싶은 역시 절친 이반의 애매한 태도가 이 연극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다. 세르주는 하얀 판때기라고 자신의 예술품을 매도하는 마크에게 격분한다. 물론 마크도 이런 그림에 감탄하는 것은 기만이라며 세르주를 비난한다. 서로 싸우고 언쟁을 벌이다가 급기야 마크의 아내까지 헐뜯게 된다. 여기에 결혼을 앞두고 문방구 사업을 준비하는 이반의 가정사까지 끼어든다.

제목은 예술을 뜻하는 '아트'지만 사실 이 연극은 자존심에 대한 얘기다. 25년 간 우정을 나누던 세 친구는 5억짜리 그림 하나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찌질하고 자기중심적인지 다 드러내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여성 작가가 썼다는 게 재밌다. 그녀는,


“사소함은 심오함 위에 떠 있는 거품과 같다. 인간 삶의 드라마는 커다란 비극적 사건들로 구성되지 않는다. 삶의 과정 속에 자연스레 발생하는 비극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삶은 작고 디테일한 문제들로 가득하다. 사소하고 소소한 사건들이 존재의 투쟁을 만들어낸다.” (출처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http://www.interview365.com/news/articleView.html?idxno=81793)


라고 말한 바 있다. 프랑스와 이란-러시아계 혼혈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가운데 성장한 야스미나 레자는 탁월한 대화와 인간 심리에 대한 섬세한 통찰로 유명하다. <아트>는 레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국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서 상연되었다. 레자는 이 작품으로 1998년 토니상 최우수 극본상을 받았다.

박호산의 흰머리 때문에 하얀 캔버스와 어울리는 머리카락 색깔 농담("대가리는 하얘가지고")이 애드립으로 등장했고 협찬품인 듯한 '비타500'을 마실 때는 '한인상점', 'k-팝에 심취한 세르주' 등 배경이 프랑스임을 인식한 재치 있는 대사들이 속출했다. 결국 세 번이나 자발적인 박수가 객석에서 터져 나왔으니 재미에 있어서는 대 만족이었다. 연극이라기보다는 TV에서 방영되는 세련된 시트콤 같은 분위기여서 관객들은 편하게 극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었다. 대사의 속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타이밍이 기가 막혔던 배우들의 연기 또한 최상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 밖에서 박호산 배우를 만나 인사를 했다. 연극 너무 재밌게 봤다고 인사를 했더니 오늘은 동창들이 놀러 와 뒤풀이를 하러 간다고 했다. 어떤 여성 분이 그에게 다가와 "진주에서 올라왔는데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도 돼요?"라고 했고 박호산이 기꺼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어떤 남자가 "박호산이다!"라고 소리를 질러 모두 웃었다. 남자는 박호산의 동창이었다. 우리는 웃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2024년 5월 12일까지 대학로 링크아트센터 벅스홀에서 상연한다.


(*커튼콜 포함해서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는 안내 멘트를 극장 직원이 돌아다니며 이백 번은 넘게 한 것 같은데도 커튼콜 때 사진을 찍는 관객이 있었다. 이런 반사회적 반예술적, 반매너적 관객을 처벌하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되겠지. 아, 화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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