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거의 인간》리뷰
일본 소프트뱅크의 창업자 손정의는 "싱귤래리티가 온다"며 은퇴를 번복했다. '싱귤래리티(Singularity)'란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넘어서는 기점'을 의미한다. 『종이 동물원』으로 유명한 SF작가 켄 리우의 ‘싱귤래리티 3부작’엔 인공지능이 발달을 거듭하다가 결국 영혼을 웹하드 같은 곳에 올려놓고 영생을 꾀하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SF가 아니더라도 AI는 이미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실정이다.
나도 지난주 국민일보에 '챗GPT로 작가가 되어 보자'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어제 본 연극 《거의 인간》이 글을 쓰는 인공지능 작가 이야기였다. 때는 10년 뒤인 2034년. 작가인 수현은 예전에 일하다 쫓겨난 출판사 사장 복희의 연락을 받고 사무실로 찾아간다. 복희의 요구 사항은 인공지능(AI) '지아'가 쓰는 소설을 검토하고 편집해서 팔리는 책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기가 막혀 거절하려는 수현 앞에 거액의 보수가 주어진다.
연극은 이 이야기 외에도 인공 자궁을 통해 아기를 낳으려는 발레리나 재영의 이야기를 교차시킨다. 재영은 무용과 교수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은 모두 온라인에 익숙한 상황이라 무대 위에서 직접 무용을 하려는 사람이 없다. 무용수 품귀 현상 때문에 졸지에 인간문화재가 될 기회까지 잡은 재영은 목사 남편과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지만 남편이 여성 부목사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안 뒤 이혼을 결심하고 인공자궁 안의 아이를 없앨 결심을 한다.
싱귤레리티가 도래하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인간은 가사노동이나 의료행위 등을 로봇에게 맡기고 글쓰기 같은 창작 활동도 기계의 도움을 받지만 바람을 피우거나 정체성의 혼돈을 겪는 등 원래 가지고 있던 오욕칠정까지 변하지는 않을 것 같다. 구두리 작가는 기계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속성을 어떻게 작품 안에 녹여낼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처음엔 AI와 함께 하는 미래가 두렵기만 했는데 작품을 위해 계속 공부를 하다 보니 오히려 희망이 생겼다고 한다. 미래도 결국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진 인성과 소박한 바람을 맥락으로 펼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AI 때문에 생겨나는 저작권 문제부터 수현의 행동으로 말미암은 윤리적 문제까지 구두리 작가와 김수희 연출이 꾸며 놓은 팽팽한 가상의 세계는 강해진, 김정은, 성여진 같은 배우들에 의해 현실감을 얻는다. 특히 이 극단의 이전작 《금성여인숙》과 《아들에게》에서 뛰어난 연기를 펼친 재영 역의 강해진 배우는 매 순간 폭발하는 열정을 보여준다(올해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연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극장을 들어갈 때 세실극장 출입구에 서서 들어오는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던 구두리 작가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이 작품도 구두리 작, 김수희 연출이라 되어 있지만 사실은 같은 사람이다. 김수희 연출의 작가활동명이 할머니 이름인 구두리다. 희곡을 쓸 때면 할머니의 집으로 내려가곤 했는데 결국은 돌아가신 그분의 이름을 작가명으로 쓰게 된 것이다. 우리가 극장에 들어서며 인사를 하자 "아유, 쓰시는 리뷰 고맙게 잘 읽고 있습니다."라고 인사를 해서 깜짝 놀랐다. 아내와 나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상태였다. 리뷰를 쓰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가 하면 오늘 오후엔 대학로 재능교육 앞 축대 앞에서 오토바이를 가지고 놀고 있던 권은혜 배우, 이예은 배우를 우연히 만나 인사를 하고 낄낄대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연극 리뷰를 더 열심히 써야 할 이유가 늘어가고 있다.
2024년 5월 22일까지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상연한다. 표가 거의 다 팔렸겠지만 그래도 기회가 되면 보시라.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