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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ul 30. 2019

월요일 아침에 조조를 보는 사람들, 월조회

대니 보일의 [28일 후]

제주도로 여행을 가서 특강을 하는 등 다른 일을 하느라 월조회를 2주나 쉬었다. 지난주는 화요일에 혼자 [알라딘]을 보았고 금요일 저녁엔 충동적으로 아내와 함께 [나랏말싸미]를 봤는데 둘 다 매우 괴로운 시간이었다. 알라딘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진부한 내용이어서 보는 내내 좀이 쑤셨고 나랏말싸미는 배우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시선이 경직되어 있어서 마음이 답답했다. 빨리 좋은 영화를 봐서 심정을 달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일요일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대전에 갔다가 일을 보고는 옥천에 사는 아내의 친구 부부 집에 들렀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매우 피곤했지만 그래도  CGV 어플을 열고 영화를 검색했다. 이런저런 영화들을 찾아보다가 [28일 후]와 [28주 후]를 재상영하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전부터 대니 보일 감독의 [트레인스포팅]과 [ 쉘로우 그레이브]를 굉장히 좋아했었고 [28일 후] 시리즈도 인상 깊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이 영화를 선택했다.


오전 11시 반 영화였기에 엄밀히 말하면 '월조회'의 원칙에 어긋났지만 어쨌든 월요일 오전이었고 이미 가지고 있던 할인권을 써서 티켓값 7천 원에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전철을 잘못 타고 서울역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가는 바람에 시간을 허비했지만 그래도 제시간에 CGV압구정 안성기관으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갔을 때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G9인 내 자리 말고 다른 데 앉아도 되겠다 싶었지만 그냥 내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그런데 예고편이 모두 끝나고 영화가 시작할 즈음엔 갑자기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G8과 G7엔 남녀 커플이 앉았고 G10에는 여자가 혼자 앉았다. 왼쪽의 커플은 팝콘을 먹고 있었지만 뭐 그러려니 했다. 문제는 오른쪽 여자였다.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스마트폰을 열고 메신저를 계속하더니 영화가 시작된 뒤에 가방에서 비닐봉지를 꺼내더니 계속 부시럭거리는 것이었다. 뭔가를 먹는 것 같았고 스마트폰도 조도를 낮춰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 같았다. 뭐라고 말을 할까 하다가 참았다. 영화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가끔 곁눈질로 여자를 쳐다봤다. 혹시 나도 뭔가 잘못하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 헛기침조차 조심하고 영화만 보았다. 영화 시작 30분쯤이 지나 여자는 한 칸 옆인 G11로 옮겨 앉았다. 아주 마음 놓고 부시럭거리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았다. 영화 내용과는 상관없이 깊은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이 영화를 어떤 매체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DVD 대여를 한참 하던 시절에 빌려 봤을 수도 있고 인터넷으로 봤을 수도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첫 장면에 나오던 텅 빈 런던의 새벽 거리였다. 대니 보일 감독이 런던시에 신청을 했고 시민들이 기꺼이 협조를 해주어서 그런 묵시록적인 장면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봉준호 감독이 아오이 유우, 카가와 테루야키 등과 함께 찍었던 중편 영화 [도쿄!]에서도 텅 빈 도쿄의 시가지 장면이 잠깐 나온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 괜한 감동이 밀려온다. 코플라 감독의 [대부] 시리즈 DVD를 보면 [대부 2]를 찍을 때 뉴욕 시민들이 축제 장면을 찍을 수 있도록 아예 집을 며칠씩이나 비워주었던 일화가 나온다. 코플라는 시민들의 협조 덕분에 사람들이 기독교 축제를 벌이며 시내 행진을 하는 날 굴뚝을 타고 돌아다니다 첫 번째 살인을 감행하는 로버트 드 니로의 모습을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런던의 새벽 장면 말고도 새로운 것이 많은 영화였다. 일단 나는 남자 주인공이 킬리언 머피라는 것을 몰랐는데 다시 보니 그 배우였다. 영민한  카리스마가 넘치고 뭔가 사연이 숨어 있는 그의 목소리와 얼굴이 영화의 품격을 더 높여주는 것 같았다.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에서 그의 존재를 처음 인식했고 넷플릭스의 드라마 [피키 블라인더스]에서 아일랜드 출신인 그의 매력에 푹 빠졌다. 배달을 하다가 차에 치어 28일 만에 깨어난 짐은 텅 빈 런던 거리에 놀라다가 셀레나와 마크를 만나면서 세상이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람들이 모두 죽고 좀비들이 득실거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웨스 크레이븐의 슬레셔 무비 [스크림]이 단순한 공포 영화를 넘어 '덕질'의 본질에 대해 묻는 것처럼 [28일 후]도 좀비 영화를 넘어서 인간의 존재가치와 관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다. 셀레나의 말에 의하면 분노 바이러스는 혈액이나 분비물에 의해 감염되는데 일단 감염되면 20초 내에 그 사람을 죽여야만 한다. 더 이상 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좀비와 싸우다 상처가 나 감염된 마크가 그런 식으로 셀레나에게 죽음을 맞는다. 이는 아무리 친한 사이거나 가족이라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기분 나쁘게 우는 까마귀를 쫓으려다가 나무에 매달린 시체에서 떨어진 분비물이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감염되는 해나의 아버지 프랭크를 고속촬영으로 보여주며 묻는다.  당신도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프랭크는 감염되어 좀비로 변하기 직전에 자신의 딸 해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뒤 발작을 일으키며 저리로 가라고 외친다. 눈물 나는 장면이다.


마지막에 옷들을 이어 붙여서 'HELLO'라는 구조요청을 하는 장면이 끝나고 나면 'What if...'라는 자막과 함께 감독이 찍어 놓은 또 다른 엔딩이 나온다. 여기서는 짐이 살아나지 못하고 셀레나와 해나가 새로운 길을 떠나면서 영화가 끝난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영화 좀 본다는 사람들은 두 번째 엔딩이 더 좋다고 하는데 나는 희망을 품고 끝나는 첫 번째가 더 좋았다. 아무튼 좀비물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2003년도에 개봉한 대니 보일의 수작을 다시 보게 되어 매우 기쁜 날이었다. 계속 비닐봉지를 부시럭거리며 같이 영화 보는 이들을 방해하던 G11의 여자도 이런 기쁨까지 앗아가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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