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19금' 필화사건
광고대행사에 다니던 시절, 사보 편집자에게 원고 의뢰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시 회사 카피라이터들이 돌아가면서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막내 카피라이터인 나한테까지 차례가 돌아온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미 쓴 글들을 읽어보니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일곱 가지 방법' 같은 명쾌하고 논리적인 글들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남들이 이미 다 했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제가 그런 글을 쓸 정도로 창의력에 대해 연구해 본 적도 없고 또 관심도 부족하니 큰일이네요,라고 엄살을 떨었다. 그러면서 글의 형식을 내가 정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형식은 물론 내용까지 다 정해도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분량에 맞춰 꽁트를 하나 쓰기로 마음먹었다. 광고회사 제작부서 사람들이 회의할 때 얼마나 웃기고 한심한지 써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서였다.
모 광고대행사 제작2팀이 L그룹의 새로운 치약 '향기나'의 경쟁PT에 돌입한다. 첫 회의인 사내 오리엔테이션 장소에서 주인공인 이십 대 후반 카피라이터는 치약의 향이 마음에 들지 않고 특히 '향기나'라는 이름이 너무 촌스럽다고 화를 낸다. 팀장은 어이가 없다. 새까만 카피라이터 새끼가 제품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열심히 해서 경쟁PT 따올 생각은 안 하고 초장부터 초를 치다니. 그러나 막무가내로 시킨다고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는 건 아니다. 회의를 진행하던 팀장은 팀원들을 달래서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다음 회의에서 만나자고 말하며 혹시 원한다면 호텔 작업도 가능하게 해주겠다고 당근을 내민다(그때는 팀비도 많았고 또 기밀 유지를 위해 호텔에 가서 기획서를 쓰는 일도 흔했으니까).
"싫습니다. 전 여자하고 자러는 가도 호텔에 일하러는 안 갑니다."
싸가지 없는 카피라이터의 되바라진 거절에 팀장은 혀를 끌끌 찬다. 아이고, 저 놈 말하는 뽄새 좀 보소....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투덜거려도 또 몇 날 며칠 날밤을 지새우며 이 경쟁PT를 치러내고야 말 것이다. 광고인들에게 경쟁PT는 어린 소녀의 초경만큼이나 붉게 타오르는 악몽이니까,라고 글을 맺어서 편집자에게 보냈다. 다른 건 약한데 그래도 마지막 줄은 좀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곧 편집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원고에 문제가 있으니 잠깐 올라오시라는 것이었다. 아니, 그냥 사보에 싣는 글인데 무슨 문제 따위가 있어? 하고 올라갔더니 30대 독신 여성인 사보 담당 직원이 원고를 좀 고쳤으면 좋겠다고 했다. 여자랑 자러 호텔에 간다는 부분이 너무 야하고 직접적이라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린 소녀의 초경이라 쓴 부분도 문제라고 했다.
기가 막혔다. 일반 회사도 아니고 광고대행사 사보인데 이런 표현도 못하냐고 엄중 항의를 했지만 편집자의 의지는 확고했다. 다른 회사에서 우리를 뭘로 생각하겠냐는 것이었다. 어떻게 생각하기는요. 오히려 칭찬을 할 텐데! 나는 계속해서 항의를 했지만 수정을 하지 않으면 글을 실을 수 없다는 의지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결국 이틀을 버티다가 '결혼할 여자가 생겼다면 모를까, 전 일하러는 호텔에 안 갑니다'라는 비굴한 문장으로 고쳐서 다시 원고를 보내며 대신 어린 소녀의 초경은 살리기로 합의를 했다. 그래도 바보 같은 글이었다. 나는 사보를 뒤적이며 킬킬킬 웃었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일종의 '필화사건' 인데 맨 처음 당한 필화가 하필 '19금'이라니. 한심했다. 그나저나 그때 고집을 꺾지 않던 그 미혼의 정숙한 편집자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결혼은 했을까. 에이, 했겠지. 아들 딸 낳고 잘 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