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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ug 01. 2019

호텔에 가는 이유

내가 겪은 '19금' 필화사건

광고대행사에 다니던 시절, 사보 편집자에게 원고 의뢰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시 회사 카피라이터들이 돌아가면서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막내 카피라이터인 나한테까지 차례가 돌아온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미 쓴 글들을 읽어보니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일곱 가지 방법' 같은 명쾌하고 논리적인 글들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남들이 이미 다 했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제가 그런 글을 쓸 정도로 창의력에 대해 연구해 본 적도 없고 또 관심도 부족하니 큰일이네요,라고 엄살을 떨었다. 그러면서 글의 형식을 내가 정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형식은 물론 내용까지 다 정해도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분량에 맞춰 꽁트를 하나 쓰기로 마음먹었다. 광고회사 제작부서 사람들이 회의할 때 얼마나 웃기고 한심한지 써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서였다.  


모 광고대행사 제작2팀이 L그룹의 새로운 치약 '향기나'의 경쟁PT에 돌입한다. 첫 회의인 사내 오리엔테이션 장소에서 주인공인 이십 대 후반 카피라이터는 치약의 향이 마음에 들지 않고 특히 '향기나'라는 이름이 너무 촌스럽다고 화를 낸다. 팀장은 어이가 없다. 새까만 카피라이터 새끼가 제품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열심히 해서 경쟁PT 따올 생각은 안 하고 초장부터 초를 치다니. 그러나 막무가내로 시킨다고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는 건 아니다. 회의를  진행하던 팀장은 팀원들을 달래서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다음 회의에서 만나자고 말하며 혹시 원한다면 호텔 작업도 가능하게 해주겠다고 당근을 내민다(그때는 팀비도 많았고 또 기밀 유지를 위해 호텔에 가서 기획서를 쓰는 일도 흔했으니까).


"싫습니다. 전 여자하고 자러는 가도 호텔에 일하러는 안 갑니다."


싸가지 없는 카피라이터의 되바라진 거절에 팀장은 혀를 끌끌 찬다. 아이고, 저 놈 말하는 뽄새 좀 보소....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투덜거려도 또 몇 날 며칠 날밤을 지새우며 이 경쟁PT를 치러내고야 말 것이다. 광고인들에게 경쟁PT는 어린 소녀의 초경만큼이나 붉게 타오르는 악몽이니까,라고 글을 맺어서 편집자에게 보냈다. 다른 건 약한데 그래도 마지막 줄은 좀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곧 편집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원고에 문제가 있으니 잠깐 올라오시라는 것이었다. 아니, 그냥 사보에 싣는 글인데 무슨 문제 따위가 있어? 하고 올라갔더니 30대 독신 여성인 사보 담당 직원이 원고를 좀 고쳤으면 좋겠다고 했다. 여자랑 자러 호텔에 간다는 부분이 너무 야하고 직접적이라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린 소녀의 초경이라 쓴 부분도 문제라고 했다.


기가 막혔다. 일반 회사도 아니고 광고대행사 사보인데 이런 표현도 못하냐고 엄중 항의를 했지만 편집자의 의지는 확고했다. 다른 회사에서 우리를 뭘로 생각하겠냐는 것이었다. 어떻게 생각하기는요. 오히려 칭찬을 할 텐데!  나는 계속해서 항의를 했지만 수정을 하지 않으면 글을 실을 수 없다는 의지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결국 이틀을 버티다가 '결혼할 여자가 생겼다면 모를까, 전 일하러는 호텔에 안 갑니다'라는 비굴한 문장으로 고쳐서 다시 원고를 보내며 대신 어린 소녀의 초경은 살리기로 합의를 했다. 그래도 바보 같은 글이었다. 나는 사보를 뒤적이며 킬킬킬 웃었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일종의 '필화사건' 인데 맨 처음 당한 필화가 하필 '19금'이라니. 한심했다. 그나저나 그때 고집을 꺾지 않던 그 미혼의 정숙한 편집자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결혼은 했을까. 에이, 했겠지. 아들 딸 낳고 잘 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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