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성 작가의 《빵야》
어제 연극 《빵야》를 세 번째 관람하고 나오는 길에 결국 극장에서 파는 대본집을 구입했다. 이 연극은 일제 강점기인 1939년에 인천 조병창 제3공장에서 만들어진 '99식 소총' 한 자루에 얽힌 한반도의 근대사와 비극적 인간군상의 이야기이지만, 액자 구성을 한 꺼풀 벗겨보면 한물 간 드라마 작가 나나가 이 총을 소재로 미니시리즈 대본을 써서 방송국이나 OTT의 편성을 받으려는 고군분투의 현장이기도 하다.
나는 처음 하성광 배우 캐스팅으로 볼 때부터 작가 나나의 입장과 총의 캐릭터에 동화되었기에 대본집에서도 앞부분에 나오는 '서사의 중심 질문' 부분부터 펼쳐 보았다. 나나가 예전에 후배들에게 즐겨 설파했다고 알려진 이 서사의 중심 질문을 실제 사례로 번역해 보면 '톰 크루즈는 임파서블한 미션을 파서블하게 썩세스시킬 수 있을 것인가?'이고 '인디애나 존스는 성배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건 소설을 쓰려면 '인생의 질문이 있어야 한다'라고 했던 김탁환 작가의 말과 통한다. 김탁환은 '인간이 얼마나 절망해야 혁명을 꿈꾸게 되는가?' 라는 질문을 가슴에 품었기에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을 쓸 수 있었다고 했다.
내가 글쓰기 강의 시간에 자주 얘기하는 기획서 쓰는 법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제작자는 두 번째 페이지를 읽을 시간이 없다, 그래서 제안서는 한 장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쌈빡한 로그라인과 신박한 시놉시스'가 필요하다, 문학적 의미보다는 대중적 재미가 중요하다, 단 세 문장으로 이야기를 사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이건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엘리베이터 브리핑'과 똑 닮았다. 어디서든 본질적인 요소들은 다 통하기 때문이다.
각본을 쓴 김은성 작가는 이토록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작품 곳곳에 심어 놓고 심지어 "대본을 쓰기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야 했습니다"라는 나나의 대사 고백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의식을 가슴 서늘하게 표현하는 '어떻게 하면 은하수를 끌어와서 무기를 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늘에 있는 은하수를 끌어와서 칼과 방패와 창과 갑옷을 깨끗하게 씻을 수 있을까? 다시는 전쟁에 쓰이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라는 메인 문장을 극 중간에 박아 넣는다. 이 문장은 1,200년 전에 두보가 쓴 시라는 것을 밝히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훌륭한 극본에 비해, 그리고 이전 두 번의 공연에 비해 어제는 좀 아쉬움이 많았다. 의인화된 총이 주인공이니 그 총 한 자루에 얽힌 죽음이나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더구나 한반도는 일제강점기부터 여순반란사건, 4.3 항쟁, 6.25 사변, 월남전, 두 번의 쿠데타, 부마항쟁, 광주항쟁 등 정치적 비극이 넘쳐 나는 땅이다. 이런 트라우마들 때문에라도 장총 '빵야'는 자신과 친해지려는 나나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그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즐거운 기억보다는 자신의 총구 앞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몸을 떠는 복합적이 캐릭터다. 그런데 어제 빵야 역을 맡은 박성훈은 그런 캐릭터를 이해하기에는 시간도 간절함도 모자랐던 것 같다. 그가 연기한 빵야는 너무 평면적이고 밋밋했다. 날카롭지 않은 저음에 뭉개지는 딕션은 작가가 쓴 훌륭한 대사들의 묘미를 살려주기엔 역부족이었다. 내가 웬만하면 이런 혹평을 하지 않는데, 더구나 어제 팬들이 많이 와서 기립박수까지 받은 '티켓 파워'를 가진 배우임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좋지 않은 걸 좋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아쉬움을 메워준 건 평안도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하던 진초록 배우였다. 상연 초반에 칼 같았던 소름 끼치던 군무도 왠지 느슨해진 기분이고 다른 젊은 남성 배우들도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어쩌면 이건 근거가 부족한 인상비평일 수 있다. 그러니 직접 보시고 판단하시기 바란다.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 연극이지만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작품이라는 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니까. 2024년 6월 18일에 시작했고 9월 8일까지 대학로 예스아트24아트원1관에서 상연한다. 선택할 수 있는 날짜가 많으니 핑계 대지 말고 한 번 보시기 바란다. 특히 작가를 꿈꾸는 분은 반드시 봐야 할 연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