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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겐 애인이 많은 이유

최희정 산문집 『오늘은 너의 애인이 되어 줄게』

by 편성준

달팽이처럼 자꾸 안으로만 숨으려 하는 자신의 모습을 떨쳐버리고 싶어진 어느 날 아침 최희정은 무작정 양양고속도로를 향해 달렸다. 현실을 직시하고 인생의 터널을 벗어나려면 진짜 터널부터 극복해 봐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양양에서 묵호까지는 터널이 60개가 넘는다. 관리비를 내기 힘들 정도로 궁핍해진 경제 사정과 요양병원을 그만두고 들어간 호스피스센터에서 경험했던 잔인한 '태움' 등 힘든 현실이 그녀에겐 모두 터널이었다. 두렵지만 눈을 부릅뜨고 그 긴 터널들을 모두 통과한 그녀는 휴게소에 차를 세운 뒤 애인에게 전화를 걸었고 애인은 잘했다는 칭찬을 잊지 않았다.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에서 탤런트 김지수가 했던 대사가 잊히지 않는다. "저는 어려서부터 피를 무서워하는 아이였어요. 그런데 집안 사정 때문에 간호대를 갔고 간호사가 되었어요. 수술실에서 피를 보는 건 죽기보다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건 제 일이었으니까요." 대충 이런 내용이었는데 최희정의 책을 읽으며 가장 마음이 아팠던 부분도 한여름에도 양말을 꼭 신는다는 대목이었다. 수술을 하기 전 의사들은 옷을 많이 껴입을 수밖에 없기에 냉방을 세게 트는데 그 수술실의 냉기를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몸이 한여름에도 추위와 수족냉증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최희정의 『오늘은 너의 애인이 되어 줄게』는 천문학과나 미대를 가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강권으로 간호대를 졸업한 뒤 스물다섯 살부터 응급실 간호사로 일해야 했던 한 여성 작가의 이야기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단추를 다시 꿸 수 있다는 반전이 남아 있다. 자신의 꿈을 투사하기 위해 시인을 꿈꾸던 사내와 결혼을 했고 허니문베이비로 들어선 첫 딸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사내는 붉은 꽃 사진이 담긴 스마트폰을 가지고 떠나 버렸다.

세상은 하루하루가 현실이었다. 다시 세상으로 나온 최희정은 자신의 이름으로 세금을 내지 않았던 사람은 대출받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옷장 깊숙이 묻어 놓은 간호사 자격증을 다시 꺼내야 했다. 하지만 그를 세상에 나오게 한 것은 간호사 자격증이 아니라 수많은 애인들의 위로와 연대, 그리고 그녀가 쓴 글에 대한 감탄과 칭찬이었다. 그런데 그녀에겐 왜 이렇게 애인이 많은 걸까.


최희정에겐 여름에도 양말을 사서 보내주는 애인이 있다. 그녀가 춥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다. 같이 여행을 가 주고 밥을 차려 주고 꽃을 꺾어주고 글을 쓰라 격려해 주는 모든 사람이 다 그녀의 애인이다. 이 책은 새벽 네 시가 두렵고, 공부방을 열 생각에 심란해지고 갚아도 갚아도 줄지 않는 빚이 심란했던 마흔다섯 살 여성이 어떻게 용기를 얻고 글로 인정을 받고 작가가 되었는지를 기록한 산문 다큐멘터리다. 누구나 사는 건 비슷하다 최희정 작가도 경제적인 문제로 친정이나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산 적도 있었고 관리비를 내기 힘들 정도로 힘들던 때도 있었다. 하진만 그 모든 걸 옛일로 얘기할 수 있는 건 그녀의 애인들 때문이다.


최희정은 말한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우리 모두에겐 사실 애인이 필요하다고. 십사만사천 명이나 된다고 얘기한 류근 시인의 애인이 문학이듯이 한 편의 글을 쓸 때마다 나타나는 최희정의 애인은 바로 연대와 격려다.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시시때때로 외로움에 떤다. 최희정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서 애인을 사귈 생각은 못 하기 때문이다. 애인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 말자. 내가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세상은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 있음을 최희정의 이 책은 아주 부드럽게 가르쳐 준다. 다 읽고 나면 다른 사람에게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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