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오징어 지우개》
'여기에 앉지 마세요'라는 안내문이 쓰여 있는 벤치에 썬글라스를 쓴 여자가 와서 앉으며 연극이 시작된다. 곧 한 남자가 나타나는데 그는 서류가방과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다. 비닐봉지 안에 든 건 오징어란다. 자신은 오징어로 지우개를 만들어 특허를 신청한 상태인데 그 때문에 불가리아 암살단에게 쫓기고 있는 신세란다. 오징어 지우개 얘기도 웃기지만 불가리아 암살단은 진짜 터무니없는 얘기다.
그런데 여자는 한 술 더 뜬다. 남자가 들고 있는 검은 비닐봉지 안에 든 건 오징어가 아니라 남자가 살해한 아이의 조각난 시체란다. 그 얘기를 들은 오징어 지우개 남자는 황당하다. 처음 보는 여자가 자신에 대해 다 알고 있다며 이런 파격적인 사실을 지껄이고 있으니까.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핑퐁게임처럼 무의미의 탑을 쌓아 올리는데 어느 순간 여자가 구사하는 '리얼리즘' 같은 단어가 연극의 주제의식을 슬쩍 보여 주기도 한다.
마지막에 잠깐 출연하는 경찰 말고는 두 사람이 러닝 타임 내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이 연극의 이름은 '오징어 지우개'다. 일본의 저명한 극작가 베츠야쿠 미노루가 쓴 한 시간짜리 단막극인데 극단 58번국도의 나옥희 대표(고수희 배우와 동일 인물)가 번역해서 단 사흘간 상연한다. 부조리극을 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한 시간 짜리라 산뜻하게 끝나는 맛이 있었다. 주연을 맡은 이종원 배우와 정예지 배우는 시종일관 에너지 넘치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대사에 웃음 포인트가 몇 개 있었는데 연출이 너무 '강-강'으로 가는 느낌이라 살짝 아쉬웠다.
실험적인 연극인데다 상연 시간도 짧아서 빈 객석이 눈에 띄었지만 고수희 배우와 이근희 예술감독의 얼굴엔 자부심이 넘쳤다.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계속 발굴하고 무대 위에 올리는 사람들이 있기에 대학로가 여전히 연극의 메카로 남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정통극보다 이렇게 삐딱하고 발랄한 부조리극이 언제나 더 좋다. 얼마 전 《구름을 타고 온 소녀들》에 출연했던 권지숙 배우가 객석에 앉아 있길래 인사를 드렸다. 며칠 뒤 바로 이어지는 58번국도의 첫 창작극이자 낭독공연인 《해녀 연심》에 출연한다. 극장에서 자주 마주치는 불교방송국 박광렬 국장님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된 우태운 셰프님은 고맙게도 아내와 내 책을 한 권씩 가져오셨길래 기쁘게 사인을 해드리기도 했다.
이번 연극을 놓치셨다면 58번국도의 첫 창작극이자 낭독공연인 《해녀 연심》을 꼭 보시라. 2024년 9월 21일, 22일 이틀간 대학로 아트포레스트 2관에서 상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