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써보는 'How to write'
아내가 가르쳐 준 한국영화 시나리오 저장 클라우드에 가보았다. 김성훈, 김지운, 류승완, 봉준호, 박찬욱, 나홍진, 이창동, 최동훈 같은 감독들의 이름이 보였다. 최동훈 감독의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을 클릭했다. 제목 밑에 쓰인 글자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14고. 시나리오를 열네 번 고쳤다는 뜻이다.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개성 있는 캐릭터를 창조하고 맛깔난 대사를 그렇게 잘 쓴다고 평가받는 그 최동훈 감독이 말이다.
글을 쓰라고 하면 대부분 글이 잘 안 써진다고 징징댄다. 거기까진 누구나 똑같다. 운명이 달라지는 순간은 그때부터다. 누군가는 거기서 포기하지만 누군가는 열네 번을 고쳐 쓴다. 괴로워도 될 때까지 쓴다. 최동훈 감독은 시나리오를 열네 번까지 고쳐 쓰는 동안 자존심이 몇 번이나 상했을까. 자신의 재능이나 운을 몇 번이나 의심했을까. 지금은 김윤석이나 김혜수, 강동원 같은 스타들이 그의 전화 한 통에 움직이거나 움직임을 멈춘다. 다 글이 만들어낸 힘이요 권력이다(물론 그는 힘이 있어도 그런 식으로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광고대행사에서 같이 근무하던 바람둥이 PD가 한 명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여자를 잘 꼬시냐고 묻는 나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목숨 걸고 덤비는데 안 넘어오는 여자 못 봤어요." 그는 매번 여자에게 목숨을 걸었다. 처음 만나 여자에게 차 열쇠를 준 적도 있다. "저랑 사귀어 주신다면 이 차를 드릴게요." 그가 내민 차 키를 보고 여자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그녀도 그와 사귀었다(아니, 같이 잤다고 했던가). 아무튼. 바람둥이가 여자에게 목숨 걸고 덤비듯 작가는 글 쓰는 데 목숨 걸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최동훈도 열네 번이나 고치는데 내가 못 고칠 이유가 없다. 처음엔 안 써지는 게 너무 당연하다. 모든 글은 다 쓰고 나서 고치는 순간부터 진짜로 쓰는 것이다. 단숨에 썼다는 천재 얘기도 가끔 있다. 그거 다 거짓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