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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ug 13. 2019

사탕 빼먹듯 하나하나 천천히 읽고 싶은 소설들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젊은 시절, 미친 듯이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돌아다니다가 방학을 해서 졸지에 같이 놀 친구가 없어졌을 때 천장을 쳐다보며 '맞아, 우리 그때 그런 미친 짓도 했었지...'라고 먼 얘기처럼 잠깐 회상에 잠기다가 개학을 하고 나면 또다시 그 분탕질의 핵으로 돌아가는 기분. 박상영의 소설을 읽는다는 건 바로 그런 느낌이다. 오늘 새벽에 일어나 전자책으로 구입한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중 첫 번째 실린 <재희>라는 단편 소설을 낮에 이어서 읽고 잠깐 카페 천정을 보았다.

이 단편은 게이인 작가가 예전에 학교 다닐 때 동거(?)를 하던 재희라는 여자애 결혼식에 온 이야기다. 재희와 작가는 둘 다 정조관념이 희박하다 못해 아예 없는 편이며 일주일에 칠일이나 팔일 술을 새벽까지 마시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런 둘의 가치를 서로 알아보고 어쩔 수 없이 친하게 지내다가 결국 오누이처럼 동거를 하며 각자의 남자들에 대해 정보를 주고받거나 심사를 하거나 하면서 질풍노도의 시절을 함께 통과해낸 그런 사이다. 내게도 예전에 게이 친구들이 좀 있어서 아는데 그들의 열정과 유머와 감각과 질투는 늘 웃기면서도 슬퍼서 결국 희비극이 된다. 아내는 박상영의 전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서 남자와 호텔을 좋아하는 게이 제제 이야기인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 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대한 짧은 농담>을 읽고 너무 슬프다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데 슬프면서 또한 매우 웃기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그렇다. 무릇 좋은 이야기는 웃기면서도 슬퍼야 하는데 박상영의 소설들이 대부분 그러하다.

그의 데뷔작인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를 읽고 주인공이 게이가 아니라(쇼핑을 예술과 거짓말을 일삼는 여자가 주인공이다) 좀 놀라긴 했지만 그 이야기의 후속작인 <부산국제영화제>를 읽고 나니 박상영이라는 작가에 대한 믿음이 더 커졌다. 그의 소설을 퀴어에 한정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번 소설 <재희>에서는 작가가 무슨 일로 재희와 싸우고 집으로 들어가 소설을 써서 소설가로 데뷔를 하던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언급한 '패리스 힐튼' 이야기도 좀 나온다. 둘이 내내 주고받는 솔직 발랄한 입담들 때문에라도 재희라는 여자애와 지내던 시절 얘기는 자조적인 웃음과 흐뭇한 눈물이 함께 솟아오르는 귀여운 소설이다. 놀라운 작가다. 자신의 이야기만으로도 이렇게 무지개 같은 이야기들을 뽑아낼 수 있는 데다가 유머러스한 문장까지 조자룡이 헌 칼 쓰듯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르는 젊은 작가라니. <자이툰 파스타...>에서 '술 마시고 모텔 가는 얘기 나오면 다 홍상수 베꼈다고 하고 벽지 예쁜 데서 사람 죽이면 다 박찬욱 베꼈다고 한다'고 투덜대던 영화감독 이야기도 정말 웃겼는데. 너무 즐거워서 두 번째 단편집을 펴 딱 한 편만 읽고 독후감부터 쓰는 이유다. 정말 정말 재밌다는 소감을 먼저 써놓고 나머지 작품들은 사탕 빼먹듯 하나하나 천천히 읽으려는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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