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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Nov 19. 2024

성북동에서 만난 김호철 선배

광고대행사 선배를 성북동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어제 동네 스터디카페에서 일을 하다가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아래로 내려오면 잠깐 나갈 테니 같이 커피나 한 잔 마시고 헤어지자고요. 동네 단골이자 스터디카페에서 가까운 킵업커피에 갈 생각이었습니다. 잠시 후 아내에게서 카톡 메시지가 왔습니다. 내려오는 중이라더군요. 하던 일을 멈추고 카페를 나와 전화를 걸어보니 길 건너 다이소에 있다고 했습니다. 아내를 찾으러 다이소 2층에 올라갔다가 한 남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야구모자를 돌려 쓰고 조끼와 캐주얼 바지를 입은 모습이 마치 김호철 선배처럼 보였습니다. 그래도 이 분이 성북동 다이소에 올 리가 없는데 하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정말 김호철 선배였습니다. 저는 이 분을 국장님, 위원님 등등으로 불렀지만 이젠 그냥 선배님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다가가서 아는 척을 했습니다. 서로 깜짝 놀라며 웃었습니다. 아니, 여기서 만나다니, 하면서요. 김호철 선배는 제가 TBWA/Korea라는 광고대행사에 잠깐 근무할 때 CD(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겸 저의 팀장님이었습니다. 그것도 잠깐이었지만요. 대단히 특이한 분이었습니다. 머리를 빡빡 밀고 다녔고 늘 청바지와 티셔츠를 고집했습니다. 담배를 피웠지만 어느 날 그냥 끊었다고 하고는 다시는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수첩에 굵은 터치의 펜으로 그리고 쓴 그림과 글씨들은 가히 예술작품이었습니다. 그는 조직 개편으로 저의 팀장이 된 첫날 팀원들을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반갑습니다. 열심히 일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책상 정리를 잘 해주시기 바랍니다. 퇴근할 때는 물론 잠깐 외출할 때도 책상이 외로워하지 않도록 노트와 필기구를 잘 정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날 멘트 치고는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그의 책상을 보니 너무나 오밀조밀하고 깔끔해서  마치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지 며칠 안 되는 군사정부의 명령으로 정비된 기획도시의 미니어처'를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연필 한 자루도 그냥 굴러다니는 일 없이 책상 한 구석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고 나머지는 연필꽂이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연필들도 비슷한 컬러끼리 모여 있어요." 팀원이었던 이성훈이 제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이며 킬킬 웃었습니다. 그의 필기구 사랑도 놀라웠습니다. 회의시간이든 외출에서든 노트와 가죽필통을 꼭 들고 다녔는데 필통 옆구리엔 그의 휴대전화 번호와 함께 "습득하신 분 연락 주시면 현금 20만 원 드립니다"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2002년도에 20만 원이라니, 놀라운 금액이죠. 그런데 그 김호철 선배를 우연히 만난 겁니다.


아내와 만나 김호철 선배를 만났다고 하니 그녀도 기뻐했습니다. "당신, 김호철 국장님 좋아하잖아." 하며 같이 커 피를 마시러 가자고 했습니다. 킵업커피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새로 생긴 커피숍으로 가야 했습니다. 김호철 선배는 성북동과 삼선동이 좋아 몇 달 전부터 작업실을 구하다가 드디어 좋은 집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어른이 된 두 아들의 근황도 얘기해 들려주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코로나19 발생 초기 박지원 선생 북토크 때 잠깐 만난 뒤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요즘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냐 물었더니 아니라고 하며 버스를 타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새 작업실 위치를 얘기하다가 아내가 1111번 버스와 1112번 버스를 타고 보문역으로 가면 이태원 쪽으로 빨리 갈 수 있다는 얘기를 하니 김호철 선배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이 분은 예전에 차를 가지고 다니던 시절에도 사람들에게 각종 버스 노선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던 '버스 덕후'였습니다. 아내가 반가워하며 자신도 지하철 타는 게 싫어 버스를 많이 탄다고 하자 김호철 선배 왈, 자기는 버스 번호를 쳐다보면서 저 버스가 예전에 몇 번이었는지, 버스 컬러는 무슨 색이었는지 생각이 나 추억에 잠긴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버스 덕후 사이에 앉은 저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아내는 김호철 선배에게 술을 드시나고 묻더니 이번 주에 술자리를 갖자는 제의를 했습니다. 즉석에서 요일과 장소가 정해졌습니다. 장소가 김호철 선배의 새 작업실로 정해지자 아내가 주소를 물어 거기로 통영의 과메기 세트가 도착하도록 조치를 했습니다. 술 관련해서는 망설임이 없는 아내입니다. 이번 주 술자리에서 더 많은 얘기를 하기로 하고 저는 급히 스터디카페로 갔습니다. 새 책 원고 수정과 함께 저녁 책 쓰기 워크숍 준비까지 하느라 아주 바쁜 상황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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