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 칼럼
지난 금요일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기획회의》에 보냈던 제 칼럼을 종이책으로 다시 읽었습니다. 이번에 다룬 책은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인데 '독하다 토요일' 멤버들과 함께 읽었던 이야기를 썼습니다. 멤버들의 이름은 제 아내 혜자 씨 빼고는 모두 가명을 썼습니다. 혹시 모임 멤버 본명을 아는 분들은 누구인지 상상하며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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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를 여는 작가를 먼저 알아보는 쾌감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단편소설집을 한 권 사면 거기 수록된 작품들을 한꺼번에 다 읽는가. 나는 그러지 못하는 편이다. 한 작품을 읽고 나면 잠깐이라도 음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그러다 보면 하루에 두 편 이상 읽는 게 부담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맨 앞에 실린 단편과 표제작을 읽고 난 후엔 다시 목차를 더듬어 마음에 드는 제목부터 골라 읽는다. 그런데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달랐다. 목차에 있는 ‘세상의 모든 바다’ ‘롤링 선더 러브’ ‘전조등’ 등은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지 힌트를 주지 않는 제목들이다. 그다음에 나오는 표제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좋다는 소문이 났으니 일단 ‘닥치고’ 읽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책을 펼친 나는 다른 책으로 눈을 돌리는 일 없이 이틀 만에 아홉 개의 수록작을 모두 읽어버렸고 급기야 아내와 내가 운영하는 독서모임 ‘독하다 토요일’ 리스트에 소설집을 올리고 말았다.
독토 회원들의 반응 또한 열광적이었다. 오랜만에 읽는 재미는 물론 주제 의식까지 제대로 갖춘 단편소설을 쓰는 남성 작가가 나타났다는 게 중평이었다. 나는 서른일곱 살 먹은 여성 조맹희가 소개팅에 지쳐 와인과 막걸리를 마구 마시다가 돌아온 날 밤 방송국으로 이메일을 보내는 바람에 짝짓기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이야기를 다룬 「롤링 선더 러브」부터 함께 얘기해 보자고 했다. 일단 작가의 입담이 장난이 아니다. <솔로 농장>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조맹희가 출연자 대신 마음을 준 피디에게서 '시시포스'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아틀라스, 프로메테우스, 인디애나 존스까지 들먹이는 혼잣말에 깔깔깔 웃었다. 마치 자신은 웃지 않으면서 시청자들을 마음대로 웃기는, 뛰어난 개그맨을 뒤늦게 목격하는 느낌이었다.
독토 멤버인 천희 씨는 「롤링 선더 러브」에서 작가가 혼잣말처럼 구사하는 문장들을 읽으면서도 불편하지 않았던 게 신기하다고 했고 혜자 씨와 여름 씨는 사소하고 희미한 사건으로 일상의 균열을 잘 포착한 「전조등」이 특히 좋았다고 입을 모았다. 그렇다고 무조건 찬양 일색은 아니었다. 소설 공부를 오래 한 현이 씨는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보편 교양」이나 「팍스 아토미카」는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고르게 다 좋은 편이었고 특히 「로나, 우리의 별」에서 이무진이나 이효리, 아이유 등이 연상되는 에피소드 전개와 짜임새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말이 나온 김에 하자면 김기태는 걸그룹 등의 ‘덕질’이나 TV,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짤’들을 너무나 잘 이용하는 작가다. 웹 세상에 떠도는 글들을 섭렵해 정리해서 들려주는 듯한 성실함과 꼼꼼함은 그가 준비된 이야기꾼임을 인정하게 했고 그러면서도 생의 중심을 관통하는 묵직한 주제의식을 놓치지 않는 점도 믿음직스러웠다. 실제 ‘덕후’거나 성실한 취재 덕분일 텐데, 아마도 두 가지 다가 아닐까 싶다. 나는 특히 「세상 모든 바다」에서 걸그룹 좋아하는 일본 친구가 주인공을 부러워하며 했던 푸념 “내가 걸그룹 좋아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두 가지로 반응해. 네가 여자가 없으니까 그러지, 와 네가 그러니까 여자가 없지.” 부분을 읽으며 많이 웃었다. 문장도 참 말맛 나게 잘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표제작인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중학생 때 교무실에 불려 가서 각각 기분 나쁜 편지봉투를 받은 권진주와 김니콜라이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는 선생님의 말을 무시하고 성인이 되도록 각자 살다 뒤늦게 서울의 주변부에 있는 ‘솥뚜껑삼겹살집’에서 다시 만나 음식을 먹는 이 이야기는 제목에 왜 인터내셔널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지 궁금해해야 한다. 물론 두 사람이 스마트폰으로 주고받는 귀여운 소녀 이모티콘의 “기립하시오 당신도!”라는 글귀 사연을 읽는 정도에서 그쳐도 괜찮지만 사실 여기 나오는 인터내셔널은 1864년 런던에서 창립된 마르크스의 인터내셔널(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 IWA) 또는 제1 인터내셔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말이고, 우리나라 운동권에서도 널리 불렸던 ‘인터내셔널가’의 가사를 쓰고 곡을 붙인 두 원작자의 이야기도 들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읽으면 훨씬 더 재밌어진다. 더구나 김기태는 작정하고 쓴 듯 ‘두 사람의 역사는 길다’라는 첫 문장 이후 ‘유명한 듀엣’들을 소설 속으로 불러낸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We are the world>의 팝스타 마이클 잭슨과 퀸시 존스가 등장하고 평양에서 악수를 나눈 문재인·김정은 두 정상, 그리고 컨츄리꼬꼬와 다이나믹듀오까지 ‘두 사람’에 대한 그의 자잘한 지식들을 따라가다 보면 이상한 쾌감조차 느끼게 된다. 닉 혼비나 조너선 샤프란 포어, 기욤 뮈소 등 서브텍스트 지식이 풍부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을 때 느꼈던 감흥이 되살아 나는 것이다.
소설가는 시인에 비해 확실히 말이 많다. 하지만 쓸데없이 글이 길어지는 게 아니라 필요한 말한 해도 아웃사이더나 이영지의 랩 수준이 되는 거라면 독자들은 그게 긴 줄 모르고 따라 읽는다. 다 필요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맹희가 스무 살에 상경한 이래 혼자 살며 두부를 데쳤고 욕실 세정제를 뿌렸으며 삼단 빨래 건조대를 조립했던 일, 지방세를 납부했으며 플라스틱 용기와 유리병의 라벨을 드라이어로 녹여 떼서 수요일과 금요일에 내놓았던 일 등을 시시콜콜 서술하는 것이나 진주와 니콜라이가 솥뚜껑삽겹살이나 보글보글 끓는 감자탕을 같이 먹는 장면을 굳이 넣은 게 다 용서되는 것이다. 아니, 그 장면들을 읽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게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단면이기도 하니까.
예영 씨는 단편소설이라고 해서 금방 읽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면서도 어떤 소설은 자신의 처지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것 같아 살짝 눈물이 났다고 고백했다. 할 말을 다 하면서 감동까지 주었다는 말이다. 김기태는 자신의 작품이 새롭다거나 ‘세태소설’이라고 외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그리고 싶은 장면이나 이야기가 있을 땐 그때마다 목소리를 바꿔가며 성실하게 묘사하고 깊게 통찰한다. 그럼 그걸 읽은 사람들은 새롭다거나 세태소설이 나타났다고 감탄한다. 좋은 작가와 작품들은 늘 이런 식으로 새 시대를 열어왔다. 김기태의 장편소설을 기다린다. 일단 기대해도 좋겠다는 확신이 생겼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