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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ug 22. 2019

순자의 일기

고양이 순자의 입장에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주인은 요즘 회사를 안 간다. 그래도 매일 뭔가 할 일이 있긴 한 건지 바쁜 척하고 어딘가를 다녀오곤 하는데 오늘은 아침에 수영장에 다녀온 이후로는 아무 데도 안 나가고 계속 노트북을 펴놓고 공책에 끄적끄적 메모를 하고 있다. 키보드를 치지도 않고 펜으로 메모나 할 거면서 뭐하러 노트북은 계속 켜놓고 있는 것인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확실히 인간들은 가성비가 떨어지는 종족이다.  

한 시간 이상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 게 괘씸해서 일단 노트북 옆으로 가서 전자책 케이스를 깔고 누웠다. 주인은 혼자 뭔가 중얼중얼하다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기도 한다. 어제 본 뮤지컬 기사를 검색하러 들어가서는 구혜선 부부가 이혼 문제로 트위터에서 싸우고 있다는 기사에 끌려 들어가 한참 들여다 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페이스북에 들어가 조국 후보자에 대한 여론 글들을 읽기도 한다. 참으로 산만한 인간이다.

쓰던 노트가 꽉 찼는지 책꽂이에 가서 지금 쓰는 것과 똑같이 생긴 노란색 새 노트를 새로 들고 온다. 이건 전에 대학로 마르쉐에서 살 때 한 권은 자기가 쓰고 한 권은 아내가 쓰기로 약속하며 산 걸로 기억하는데 결국 남편이 두 권 다 쓸 생각인 모양이다. 남편이 집에서 자기 노트를 훔치는 것도 모르고 회사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그녀가 약간 불쌍하다.

저 남자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재밌지도 않고 신기하지도 않은 주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하품이 난다. 나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 눈을 감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주인을 쳐다본다. 주인이 "순자~"라고 괜히 한 번 부르더니 성의 없이 목덜미를 쓸어준다. 고양이들은 대체로 주인을 한심하게 생각한다고 하는데 나도 그렇다. 우리 주인도 한심하기로 치면  남들 못지않다. 술을 좋아하고 산만하고  건망증이 심하며 밥을 많이 먹는다. 잘하는 건 설거지밖에 없다. 여러 가지로 걱정되는 인간형이다.

예전에 일본에서 살던 선배 고양이 하나가 사는 게 너무 무료하고 답답한 나머지 주인의 입과 펜을 살살 꾀어 인간들의 한심함을 폭로한 적이 있다. 나쓰메 소세키라는 소설가가 기르던 고양이였는데 그렇게 해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소설이 탄생했다. 이 소설은 의외로 빅 히트를 쳤고 작품의 성공에 고무된 나쓰메 소세키가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쓴 것이라고 우기는 바람에 그 고양이와 법정 다툼까지 했다고 들었는데 그때는 저작권법이 없던 시절이라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고양이 신문을 한 번 찾아봐야겠다.  

말이 났으니 말인데 나도 그때 그 선배처럼 인간들을 관찰하고 비평하는 글을 한 번 써보면 어떨까 싶다. 내가 글을 써서 발표하고 나면 우리 주인도 소세키처럼 자기가 썼다고 박박 우기려나 좀 걱정이 되기는 한다. 그럴 경우 불 같이 화를 내며 사납게 싸워야 하는데 여자 주인이 나를 데려올 때 이름을 '순자'라고 지어주는 바람에 성격이 너무 순해져 이제 와서 제대로 화를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래저래 인간들은 마음에 안 들고 눈치도 없는 종족이다. 당장 우리 남자 주인을 보라. 내가 이 정도 눈치를 줬으면 냉큼 욕실로 가서 새로 산 브러시로 내 몸을 쓸어줘야 할 것 아닌가. 새로 바뀐 로열캐닌 인도어27 사료가 입맛에 안 맞아 단기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계속 물이나 갈아주고 있는 저 바보를 도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런데 아까부터 졸립다. 가뜩이나 고양이는 잠이 많은데 주인도 이렇게 눈치가 없고 지루한 캐릭터이다 보니 잠이 쏟아지지 않을 리 없다. 에이, 낮잠이나 더 자자. 그래도 일단 점심 해먹고 설거지 한 뒤에 에어컨을 가동하기 시작한 건 좀 마음에 드는군. 안 그래도 더웠는데 잘했어. 이제 더위도 한풀 꺾였다고? 무슨 소리야. 당신도 나처럼 사시사철 검은색 털코트 입고 지내봐. 그런 소리가 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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