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주와 목수 간의 소통과 이해가 시너지를 만든다
흔히 집을 짓거나 고치는 사람들은 그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라는 소리를 한 번 이상 하며 한숨을 쉬는 걸로 알고 있다. 한숨 쉬는 걸 넘어 큰 병을 얻거나 경찰서에 간 사람 이야기도 알고 있다(집 공사를 하다가 사기를 당한 사람, 바람이 나 이혼한 사람 이야기를 각각 들었다). 그만큼 집 공사라는 건 일생일대의 사건이고 골치 아픈 이벤트라는 의미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일을 벌써 세 번씩이나 벌이고 있으니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은 게, 아내와 나는 남들보다 '집수리 스트레스' 지수가 적은 편이다. 비결은 단 하나, 목수님을 잘 만나서다.
임정희 목수님을 만난 건 출판기획자인 아내가 기획했던 로버트 파우저 교수님의 책 뒤풀이 덕분이었다(5개국어에 능통한 언어천재 파우저 교수님은 아내와 함께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한 책도 냈다). 그날 밤 아파트를 떠나 개인주택에서 살고 싶어 몸살이 난 우리 얘기를 들은 파우저 교수님이 임정희 목수님을 연결해 준 것이다. 임 목수님은 서촌 등지에서 활약하던 한옥 전문 목수였는데 목수일과 인테리어까지 겸하는 팔방미인이었다. 물론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나중에 '천재목수'라고 부르게 된 김치열 목수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임 목수님을 소개받고 제일 먼저 우리가 부탁한 일은 아내가 고른 단독주택이나 집터를 함께 보러 가는 것이었다. 서너 군데를 함께 다녔는데 임 목수님은 여간해서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너무 낡은 집은 위험해서 안 된다고 했고 사방이 가로막힌 집터는 생활이 불편하다며 퇴짜를 놓았다. 그러다 만나게 된 성북동 언덕 꼭대기의 작은 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여긴 한 번 해볼 만하겠는데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때는 내가 아직 회사를 다닐 때라서 며칠을 목수님에게 맡겨 놓기만 하고 공사장을 등한시했다.
그러다 드디어 시간이 나 아내와 함께 수박을 한 통 사 들고 성북동 골목으로 들어서니 저 멀리서 요란한 굴착기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소음의 진원지가 설마 우리 집은 아니겠지 생각하며 올라가다 보니 목수님이 있는 공사장에서 나는 소리가 맞았다. 혼비백산해서 공사장 바로 옆집으로 가 인사를 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런데 그 집에 사는 분들은 "집 공사 하다 보면 시끄럽고 먼지도 나고 그러는 거죠 뭐."라며 사람 좋게 웃었다. 나는 목수님 주려고 샀던 수박을 그 집에 주고 내려왔다.
그 집을 고쳐 '성북동 소행성'이라는 이름을 짓고 살다가 4년이 지나니 슬슬 진력이 나기 시작했다. 마침 산책하다 발견한 빈 한옥이 마음에 들어 덜컥 계약을 하고 임 목수님을 불렀다. 한성대입구역 근처에 있는 그 한옥을 보고 임 목수님은 "낡긴 했지만 최근에 제가 본 한옥 중 제일 상태가 좋네요."라며 공사를 해보겠다는 의욕을 내비쳤다. 즉시 팀을 꾸려서 공사를 시작했다.
이사까지 남은 시간은 딱 두 달이었으므로 아내는 어떡하든 그 기간 내에 공사를 마무리해 달라고 부탁했고 임 목수님은 남은 기간을 역산해서 촘촘하게 공사 계획을 세웠다. 공사계획을 빈틈없이 효율적으로 짜는 게 임 목수님의 특기였다. 마침 회사를 그만둔 아내와 나는 매일 아침 열 시면 공사장으로 내려와 목수님의 브리핑을 듣고 의견을 내놓았다.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단순했다. 아내가 이렇게 이렇게 해주세요, 라고 했을 때 알았다고 하면 수용된 것이었고 안 됩니다, 라는 소리가 나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는 목수님이 안 된다고 할 때는 늘 "네."라고 하고는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전문가가 말리거나 곤란하다고 할 때는 다 이유가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매일 그렇게 똑같은 시간에 두 사람이 내려와 잠깐 얘기하고 올라가기를 반복하는 게 신기했는지 "도대체 뭐 하는 분들이세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며 킬킬 웃었는데 결국 그 멘트는 그대로 나의 첫 책 제목이 되었다. 그리고 완성된 한옥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세미나도 하는 바람에 제법 매스컴을 탔다. 'EBS 건축탐구 집'에도 출연하면서 임정희 목수님의 포트폴리오가 된 것은 물론이었다.
지은 지 80년 된 한옥 '성북동 소행성'(위에서 지은 이름을 가지고 내려왔다. 이사 오는 사람이 이름을 가져가면 어떡하냐고 하길래 새 이름을 지어주고 내려왔다)에서 4년을 살고 나니 또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이번엔 보령으로 이사를 했다. 아내는 다시 임 목수님에게 SOS를 쳤고 목수님은 팀을 이끌고 보령까지 내려와 공사를 시작했다. 이번 집은 1970년대에 보령시 대천동 구 시가지에 지은 집인데 집은 작지만 앞마당과 뒷마당이 넓어서 아이디어만 잘 내면 활용할 공간이 많은 곳이었다. 아내는 뒷마당에 내 집필실을 마련해 주겠다고 하고 증축에 신축 공사 허가까지 받았다. 보령 시청에 다니는 분에게 소개받은 젊은 건축사 백찬슬 대표가 도와주었기에 빠르게 결심하고 진행할 수 있었다.
2월 17일부터 시작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고 우리는 신축 공사로 인해 늘어난 비용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임정희 목수님, 김치열 목수님, 장 반장님, 그리고 새로 들어온 건희 씨까지 네 사람 한 팀이 보령의 모텔을 잡고 숙식을 하며 공사를 하고 있다. 전기 윤경만 반장님은 필요할 때만 보령으로 내려오신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임 목수님을 만난 건 행운이다. 임 목수님은 PM역할을 정말 잘한다. 늘 일기예보를 보고 비가 올 때를 대비해 공정을 짠다. 아침 7시면 시작되는 공사는 오후 4시면 끝이 나고 점심 식사 때는 막걸리 한 잔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찔끔찔끔 간식을 사가지고 가는 대신 이주일에 한 번씩 고기 회식을 하기로 했다. 공사 첫날엔 삼겹살집에서 점심을 먹었고 장어와 삼겹살 회식 때는 인부들과 어울려 술도 많이 마셨다. 물론 임 목수님은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원래 술을 싫어하는 사람인 것이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지만 집을 고치는 경우에도 가장 중요한 건 커뮤니케이션, 즉 의사소통이다. 서로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해결점을 찾는 게 성공의 시작이라 생각하는데 그건 임 목수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끔 '공사 잘 되어 가느냐'라는 지인들의 전화를 받으면 우리는 "공사를 뭐 우리가 하나? 공사는 돈이 하는 거야."라며 낄낄 웃는다. 목수님이 필요하다고 할 때마다 돈만 잘 가져다주고 나면 다른 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인데 그건 그만큼 목수님을 믿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전문가의 말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전문가를 쓰는 것만큼 불행한 건축주도 없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우리가 어설픈 건축 지식이 없는 걸 다행으로 여긴다. 우리가 아이디어를 낼 분야는 '삶의 가치'와 ‘라이프 스타일’이지 '아키텍처'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