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코너스톤의 《요새는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그 윷놀이》
작년에 한성대입구역 근처에 있는 여행자극장에서 이 작품을 보았을 때는 아연실색했다. 다 큰 어른들이 모여 햇볕을 쬐며 실없는 대화를 충청도 사투리로 주고받다가 "윷놀이나 한 판 하지 뭐." 하고 가마니를 깔고 분필로 윷판을 그린 뒤 허잇차~ 하고 윷을 노는 게 뭐 재밌을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극이 진행되자 윷놀이는 생각보다 진지해서 한 번 윷을 던지고 말판을 옮길 때마다 네 명의 배우들에겐 목숨을 건 승부욕이 발동한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
이 연극의 묘미는 강일, 한철훈, 이강민, 윤슬기, 정홍구 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충청도 사투리, 그리고 극강으로 몰아치는 그들의 '고속촬영' 같은 과장된 표정 연기에 있다. 특히 마지막 '윷-윷-걸'이 연속으로 펼쳐질 때 보여주는 감질나는 '슬로비디오'의 반복은 직접 보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연극적 요소들의 집합체다. 그런데 이 연극은 시작부터 상여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끝날 때도 웃음과 울음이 섞인 장송곡으로 마감한다. 그러니까 한참을 웃다가도 이철희 연출은 왜 인생을 윷판에 비유했을까 생각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연극이 끝나고 이철희 연출을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도 윤조병 선생의 아들 윤시중 선생이 보내 준 희곡집 중 '윷놀이'라는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땐 너무 짧고 싱거운 희곡 내용에 당황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뛰어난 극작가였던 윤조병 선생이 이 싱거운 극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랬을까, 라는 작가적 호기심이 내적 동기를 유발했다. 이 작품은 아직 아무도 무대에 올리지 않았으니 내가 한 번 해보자, 이 희곡 내용에 충청도 사투리의 특징인 느림과 답답함을 한껏 입히고 배우들에게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는' 극강의 희극 연기를 부탁해 보자, 이런 결심이 서자 제목도 다시 눈에 들어왔다. 연극 제목도 그냥 윷놀이가 아니라 '요새는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그 윷놀이'로 바뀐 이유다.
원작의 리얼한 농촌을 구현하기 위해 처음엔 무대 위에 진짜 흙을 깔 생각이었지만 그러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어 포기하고 대신 분필로 윷판을 그리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면서 연극의 주제는 더 명확해졌다. 누구나 인생을 살며 뭔가를 이루려 애쓰고 또 간혹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지나고 나면 그 과정이 다 윷놀이 한 판 노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남는 건 결국 같이 윷을 놀았던 사람들뿐이구나 하는 깨달음 말이다. 이철희 연출은 사이즈가 무대와 똑같은 연습실을 마련해 배우들이 눈을 감고도 동선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숙달시켰다. 그래서 암전 되었을 때에도 야광스티커 한 장 없이 완벽하게 제 위치를 찾아 움직이는 배우들의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이 완성된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인생이 답답할 때마다 이런 메타포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기 위해 극장으로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마음에 화답하듯 바로 눈앞에서 허구의 윷을 던지고 소리소리 지르며 최선을 다 하는 배우들을 볼 때 '아, 인생이라는 건 돈 벌고 밥 먹고 잠자는 것 말고도 참 할 게 많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계엄성 불면'의 나날이 계속되는 답답한 시국에 숨통을 잠깐이라도 티워주는 이 연극이 반가웠다.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4월 6일까지 상연하니 시간이 허락한다면 꼭 보시기 바란다. 고향이 충청도인 분들과 같이 가면 여러 모로 더 웃기고 찡한 이벤트가 될 것이다.
● 윤조병 원작 윷놀이
● 이철희 각색 연출
● 강일 곽성은 한철훈 이강민 윤슬기 정홍구 출연
● 이경구 안무 움직임
● 장서윤 작창
● 이승호 음악
● 남경식 무대디자인
● 코너 스톤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