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극장에 다시 갈 결심

명필름아트센터에서의《헤어질 결심》 GV 후기

by 편성준


결혼기념일인 5월 25일에 파주에 있는 명필름아트센터 영화관에 갔습니다. 이 날 명필름아트센터에서 10주년 기념으로 뭘 할까 고민하다 박찬욱 감독을 모시고 《헤어질 결심》 GV를 한다고 하길래 아내가 행사에 초대해 달라고 부탁을 했거든요. 심재명 대표가 부탁을 들어주셔서 다행이었습니다. 2분 만에 표가 다 팔렸다고 하니까요. 보령에서 파주까지 차를 몰고 갈 만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만 세 번째 보는 건데 명필름아트센터의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는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오더군요. 파주라 너무 멀어 그동안 오지 못한 게 화가 날 정도였습니다. 뛰어난 음량과 음질 덕분에 새로 발견한 장면도 많았고 영화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배우들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컸습니다. 홍산호로 열연한 박정민이나 수완 역의 고경표는 처음 볼 때부터 눈에 띄었지만 이주임으로 나왔던 유태오나 수면클리닉 닥터 역의 최대훈('폴싹 속았어요'의 그 하 씨 아저씨), 그리고 철썩 이로 분한 서현우도 눈에 띄는 얼굴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시공간이 마구 뒤섞이고 생략된 부분도 많아서 매우 시적인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박찬욱 감독이 그렇게 얘기를 해 주어서 반가웠습니다('헤어질 결심'이 시적이라면 지금 준비하고 있는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산문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죠).


박찬욱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는 여러 번 보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게 된다면서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봤다고 합니다. 보면서 여전히 고치고 싶은 부분이 보여 괴로웠다는 엄살도 잊지 않았죠. '어쩔 수가 없다' 찍느라 바쁜데 이렇게 GV에 응해 줘서 고맙다고 심재명 대표가 인사를 하며 "'리틀 드러머 걸' 이후 좀 작은 이야기, 그러니까 최소한의 요소로 구성된 영화를 하고 싶다,라고 하더니 이 영화를 만들었다."라며 영화 시작점을 정확히 짚어냈습니다. 의례적인 진행이 아니라 필요한 팩트들을 쥐고 사회를 보는 심재명 대표를 보니 역시 기획자로서의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어렸을 때 정훈희의 '안개'라는 곡을 좋아해서 언젠가는 이 노래에 어울리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정훈희와 송창식은 대학시절 우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서경 작가는 《색, 계》를 보고 탕웨이에 홀딱 반해서 언젠가 이 배우를 데리고 영화를 찍고 싶다는 야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감독과 작가의 꿈이 한 데 모여 만들어진 영화가 《헤어질 결심》이었던 거죠.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가 필름 누아르보다는 로맨스로 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우린 로맨스 안 돼요"라고 버티는 정서경 작가를 설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마 로맨스가 가장 발생하기 힘든 형사와 피의자가 주인공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수사 중 거짓말을 꾸며내는 것은 물론 심지어 서래는 연쇄 살인범이고, 그걸 관객에게 모두 공개하며 갔는데도 두 사람의 사랑만큼은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는 독특한 장치와 캐릭터들이 있었던 거죠.


배우 이야기도 많이 했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평소 '가장 중요한 건 외모'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건 잘생기고 못생긴 걸 떠나 드러나는 얼굴이 따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박쥐》에 나왔던 김옥빈 같은 배우는 춤을 춰서 그런지 걸음걸이부터 달라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해일도 그런 경우였습니다. 해준은 수트와 넥타이를 착용하는 형사인데 신발도 구두를 신고, 어쩔 수 없을 때는 검은색 운동화를 신는 사람으로 설정했습니다. 주머니가 많은 옷을 입어서 뭘 많이 넣고 다니지만 권총은 잘 쓰지 않는 형사. 그리고 청결한 사람이었죠. 박해일 배우가 딱 그런 외모이기에 그를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이 잘 통하지 않는 탕웨이와도 로맨스가 피어날 수 있었던 것이고요.


관객과의 대화 시간엔 같은 스태프와 함께 계속 일을 하는 비결,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박찬욱, 크리에이터로서의 박찬욱 등에 대한 여러 질문과 답변들이 있었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스타일리스트로 보이기 위해 어떤 요소를 넣는 게 아니라 영화에 필요하다 생각하는 것만 최선을 다해 넣다 보니 저절로 독특해진다는 말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우문현답이죠. 박 감독은 '그저 다르려고 하는 게 목표여서는 안 되고 장면마다 정확한 목표와 이유가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며 자신이 추천사를 썼던 신형철 평론가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예로 들었습니다. 예술은 모호할 것 같지만 사실은 정확한 걸 추구해야 가능한 사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나리오나 콘티는 아주 세밀하게 정확히 다 짜 놓고 촬영 현장에서는 배우들과 농담하고 노는 것 같은 이상적인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 거죠. "그러니 영화를 보다가 뻔한 게 나온다면 그건 내가 잘못한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열심히 해서 '포스트 봉준호'가 되겠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을 웃겼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3층에서 감독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끼일 수 있었는데 김창남 교수님 부부와 장영승 선생도 뵙고 올댓시네마의 채윤희 대표, 상상스쿨의 오연조 대표도 만나서 너무 설레고 기뻤습니다. 아, 영화 시작 전 2층과 3층 전시실에서 명필름에서 제작한 작품들을 둘러보며 마음이 숙연해졌다는 얘기도 꼭 해야겠습니다. 심재명 대표와 이은 감독의 남다른 열정과 능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아내와 이 극장에 꼭 다시 와서 애트모스 사운드를 경험하자고 결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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