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그 시인

매일 아침 비타민처럼 복용하면 좋은 책 한 권 소개해 드립니다

by 편성준



이삿짐을 풀고 책꽂이 정리하다가 자주 들춰보던 책이 바닥에 툭 떨어지길래 바닥에 퍼질러 앉아 새삼 펼쳐본다. 내가 조금 무서워하는(?) 시인이 쓴 '오늘 사랑한 것'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다. 시인들이 쓴 산문집이 대개 그렇듯 이 책 역시 시집이 아닌데도 글이 딴딴하고 깊고, 심지어 유머러스하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냐고 묻는 당신에게 증거를 보여주겠다(당장 귀퉁이를 접은 데만 몇 군데 펼쳐봐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글들이다......


1

돌아보면 내 삶은 장난스러움과 진지함 사이에 있었다. 개구진 아이였는데 점차 진지한 소년으로 변모했다. 무게 잡기를 좋아해서 엄숙과 친했다. 결국 엄숙과 결혼했는데, 나는 엄숙과의 결혼을 후회한다.

2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는......(중략) 벚꽃이 지는 속도를 초속 5cm로 표현했는데 시속으로 환산하면 0.18Km이다. 그리움의 속도다. 이 벚꽃 지는 속도로 내 입술이 너의 뺨에 가서 닿는다. 이것은 별 하나가 별 하나와 충돌한 것과 같은 우주적 사건이다.

3

사랑은 한 번은 직선으로 살고 한 번은 곡선으로 산다. 직선의 세계에는 열화하는 삶이 있고 사선의 세계에는 머무는 삶이 있다. 처음에는 자랑처럼 홀로 서지만, 사랑은 점점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운다......(중략) 비스듬한 사랑은 홀로 서지 못해 누군가의 부축으로 걷는다.

4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 살아간다는 것이다.

지나간다는 것은 지금 지나간다는 것이다.

쓴다는 것은 지금 쓴다는 것이다.

5

흙 1센티미터를 만드는 데 100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시간이 그토록 오래 걸리는 일을 지구는 묵묵히 해왔는데 인간의 농업은 불과 100년 남짓의 시간으로 지구의 흙을 유실해 버리고 오염시켜 버렸다.


어떤가. 싱거운 소리를 하는 듯하면서도 아이디어가 넘치고 시적인 상상력이 마침내 환경 문제까지 발을 뻗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책은 한꺼번에 읽으면 안 된다. 하여, 매일 아침 비타민 섭취하듯 한 페이지씩 복용하기를 권한다. 몸에 좋고 마음에 좋다. 아, 그 이상하고 무서운 시인의 이름은, 림태주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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