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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던 책을 700권 넘게 버렸다

대천동으로 이사하면서 또 700~800권 골라냈습니다

by 편성준


이사하면서 이삿짐센터 직원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멘트는 "집 크기에 비해 살림이 많네요"'와 "책이 너무 많아요'다. 이삿짐센터 사장님이나 직원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비호감 멘트로 고객 길들이기 워크숍'이라도 여는 걸까. 정말 궁금하다. 어차피 짐을 나르러 온 사람들인데 짐이 많다고 트집을 잡다니. 짐이 단출하면 단출하다고 뭐라 할 사람들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남의 집을 호주머니 뒤집듯 탈탈 털어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을 하다 보니 짜증이 나서 그런 말들이 입에 붙었을 것이다. 이해는 한다. 이해는 하는데...... 어쨌든 이번에 보령 명천동에서 보령 대천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나는 또 넘치는 책을 골라내야 했다.


이사 첫날은 지게차를 통해 이층 서재로 부려진 책들을 망연자실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아내와 함께 아래층 기본 청소를 하고 살림살이를 대충 정리하게에도 힘에 부쳤다. 다음 날 이층에 올라온 나는 '책은 좀 천천히 정리하기로' 아내에게 양해를 구했다. 도중에 서울에 갈 일이 있어서(책방 수북강녕에서 조영주 작가 북토크 사회를 봤다) 그냥 다 놔둔 채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오기도 했다. 내가 서울에서 일을 보는 동안 아내가 내 책꽂이를 조금 정리해 주기도 했다. 시집과 글쓰기 관련 책만 우선 모아 놓았다고 했다.


당장 요즘 자주 읽는 책들과 글쓰기에 관련된 책들, 인문학·소설·에세이 들을 엄선해 챙겼고 나쓰메 소세키 전집도 산 지 몇 년 안 된 데다가 제대로 몇 권 읽지 못했으니 고이 모셔야 했다. 대신 너무 오래된 책, 예를 들어 최인훈의 『회색인』처럼 세로 쓰기로 된 책은 버리기로 했다. 혹시나 해서 보령시립도서관의 윤여정 실장에게 전화로 물어보니 도서관에 기증할 수 있는 조건은 5년 이내에 발행된 책, 겉은 물론 안쪽까지 깨끗한 책, 도서관이 이미 소장하고 있지 않은 책 등이었다. 선량한 마음으로 가져갔다가도 마음이 상할 수 있는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역시 '나만 소중하게 여기지 남에게 가면 짐이 되고 마는 것'이 책이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오래된 소설과 에세이 등을 인민재판하듯 잔인하게 골라냈다. 홧김에 벽초 홍명희의『임꺽정』과 이병주의 『지리산』전집도 버리려고 했으나 아내가 만류하는 바람에 영화잡지《키노》 와 함께 학살을 면하고 아래층 거실 책꽂이로 갔다. 계간지 《판타스틱》은 당연히 살려야 했으나 어렸을 때 본 《현대문학》은 이제 그만 버리기로 했다. 버리면서 생각했다. 없어도 된다, 그동안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은 책이 있었던가, 없어도 된다. 혹시 다시 읽고 싶어질지 몰라서, 혹시 중요한 걸 다시 확인하고 싶어질 때 없으면 아쉬울까 봐 가지고 있던 책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 않은가. 내 광고대행사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도 광고주 회장님이 혹시 찾으실지 몰라서 만든 보고서나 시안이 얼마나 많았던가. 클라이언트는 신경도 안 쓰고 있는데 '혹시 필요할지 몰라서' 자체적으로 준비한 기획과 아이디어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버려야 한다, 없어도 큰일 나지 않는다...... 이런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책을 고르고 묶고 쌓아서 마당으로 가져가며 책 묶음 사진을 찍을까 하다가 말았다. 왠지 나 책 많다고, 책 많이 읽은 먹물이라고 전시하는 것처럼 느껴서였다. 다이소에서 산 플라스틱 박스 안에 묶은 책을 넣어 재활용 쓰레기장으로 가져갔다. 너무 무거워서 박스 반만 차도 혼자 들 수 없을 정도였다. 버린 책들을 대충 세어 봐도 700권은 넘는 것 같았다. 어치피 버렸으니 뒤도 돌아보지 말자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와 이층에서 고양이 순자와 놀고 있는데 재활용 쓰레기장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이층 현관문 방충망창을 통해 보니 어떤 아줌마가 내 책을 양손에 들고 다른 아줌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유, 많아, 두 번은 왔다 갔다 해야겠는데."

허무하게도 아줌마는 무게와 부피로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걸 고르느라 머리가 터질 듯 고민을 했는데. 그렇지. 저분에게 저 책들은 그저 파지일 뿐이지. 없어도 된다, 없어도 된다...... 나는 다시 주문을 외웠다. 도서관에 가면 천지가 책이다, 지금 있는 책들도 읽을 시간이 없어서 고민이다, 매번 사는 책들 때문에 집에 책이 넘친다. 책 없어도 큰일 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책을......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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