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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통해 들여다보는 한국 이야기

연극 《관저의 100시간》

by 편성준

사람의 역량은 위기에 닥쳤을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고 한다. 이는 사람뿐 아니라 국가에도 해당된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왔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품격과 발전 가능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연극 《관저의 100시간》은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가 났을 때 이야기를 기록한 기무라 히데야키 원작을 모티브로 했지만 그 사건에 깔려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은 황나영 작가가 모두 우리나라에 맞춰 새롭게 창조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큰소리를 쳤던 후쿠시마의 원전들이 폭발 위기에 처한다. 마침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던 곤도 내각은 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싶어 하지만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이들에게 그런 행운이 올 리가 없다. 비상사태에 대한 매뉴얼은 갖추어지지 않았고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알고 보니 모두 허당이었다. 일 분 일 초가 급한 상황에서도 정부 내각은 관료주의에 빠져 소리만 지르고 있고 원전의 에너지 공급을 책임지고 있는 토오전력은 기업의 이익을 지키느라 국민이나 나라의 안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총체적 난국이란 이런 모습 아닐까 하는 상황이 계속 펼쳐진다.


마당극에 뿌리를 둔 오세혁 연출의 작품답게 연극은 떠들썩하고 배우들은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느라 바쁘다. 사방으로 트인 무대는 2층 난간까지 입체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내각과 피해자들의 사연과 상황을 자연스럽게 오버랩시킨다. 여기에 한국의 현재를 연상시키는 '곤도 어게인'이라는 구호나 "국민의 힘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국민의힘!" 같은 대사들이 왜 하필 후쿠시마 원전 얘기를 2025년에 한국에서 다시 봐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매뉴얼은 없고 책임을 질 사람도 없고, 윗사람 비위 맞추기에만 연연하는 관료들의 모습을 보면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때도 저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데 프로그램북 시놉시스에 있는 '혹여 한국 정치현실과 닮았다 하더라도, 모두 우연의 일치입니다'라는 문장은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신랄한 블랙유머 카피다.

나는 개인적으로 레즈비언 커플인 후미에와 미오가 가장 눈에 밟혔다. 가난한 연인인 두 사람은 도교전력 직원이었던 미오와 살기 위해 음악가인 후미에까지 후쿠시마로 내려온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약자인 동성커플은 사랑을 꽃피우지 못한 것은 물론 비상사태에서도 법적인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그런데 그 모든 불행과 불평등이 못난 위정자들 때문인 것이다. 화가 나고 눈물이 난다. 그나마 연극의 후반부 서무직원 고마쓰 역의 송영미 배우가 총리에게 내뿜는 사자후(아니요, 처음부터 그러셨어요. 당신은 계속 숨고 피하고 남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기에만 바빴죠!)가 조금 숨통을 틔워주었다.


캐스팅이 미친 경지의 연극이다. 최영우, 이경미, 김대곤, 김늘메, 송영미, 유일한, 오현서, 김건호, 류동휘, 박완규, 임찬민, 이아진, 류아벨, 김려은에 이르기까지 대학로에서 잘 나가는 배우들을 모두 모아놓은 느낌이다. 연극이 끝나고 오세혁 연출에게 물어보니 집 벽에 배우들 이름과 사진을 쫘악 붙여놓고 작품을 만들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창작가 중심의 공연창작집단 '네버엔딩플레이'를 이끌고 있는 오세혁이기에 가능했던 '우수 인력 동원'이었던 것이다.


어제가 공연 3일 차였다. 100분으로 시작했으나 이런저런 사항들을 보완하다 보니 120분으로 늘었다는 러닝타임이 끝나고 눈물을 닦으며 일어선 아내와 나는 배우들의 회식장소까지 따라가서 술을 마시는 호사를 누렸다. 원래는 저녁 8시 반 버스를 타고 보령으로 내려갈 예정이었으나 아내가 "버스표 취소했어. 내일 아침에 내려가자."라고 말하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아내가 김대곤 배우에게 '초선의원' 때 노무현 역할 맡으신 거 너무 좋았다고, 인상적이었다고 말하지 김 배우도 당시를 회상하며 기뻐했다. 그 밖에도 여러 바우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술에 취해 이야기는 술잔 속에 담기고 우리는 택시 안에 담겨 겨우 집으로 왔다.


2025년 6월 29일까지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공연한다. 시간 내서 꼭 보시기 바란다. 우리는 한 번 더 볼 생각인데 전회 매진이라 표가 있을지 모르겠다.

● 원작 : 기무라 히데아키

● 작가 : 황나영

● 연출 : 오세혁

● 배우 : 최영우, 이경미, 김대곤, 김늘메, 송영미, 유일한, 오현서, 김건호, 류동휘, 박완규, 임찬민, 이아진, 류아벨, 김려은

● 드라마터그 : 조민영

● 프로듀서 : 이보람

● 장소 : 대학로쿼드 극장

● 기간 : 2025년 6월 20일 ~6월 29일

● 제작 : 네버엔딩플에이

● 주최 : 서울연극협회, 오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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