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보면 더 좋은 사람, 이슬아 작가

성곡미술관에 갔던 날

by 편성준


'일간 이슬아'의 첫 시즌 구독자였다. 오토바이 위에 앉아 있는 소녀 옆에는 '아무도 원한 적 없지만 그래도 쓴다' 같은 키치적 문장들이 보였고 저자 약력엔 한국누드모델협회 회원이었다는 구절도 있었다. 나는 그때 CM 프로덕션에 다니고 있었는데 바빠도 바빠도, 너무 바빴다. 대부분의 광고 일이 그렇듯 보람 있게 바쁜 것도 아니고 '뻔히 아닌 걸 알면서도 밤을 새워 해야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당연히 다른 글을 읽거나 영화를 볼 시간이 없었다. 구독했던 일간 이슬아도 '화살기도' 같은 제목이 겨우 기억날 뿐이다. 헬스클럽 회원권 끊어 놓고 두세 번 가고 나면 그만이듯이 나는 이슬아의 글이 매일 뜨는 이메일의 제목만 겨우 확인하고 살았다. 하지만 일간 이슬아는 작가의 자기 PR이나 글 유통에 있어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고, 이슬아는 단숨에 젊은 작가의 아이콘이 되었다.


올해 3월 '일간 이슬아가 돌아옵니다'라는 SNS 게시물이 떴다. 이미 십여 권의 책을 낸 작가 이슬아가 자신의 소설 『가녀장의 시대』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의 대본 작업에 지쳐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마음에 초심으로 돌아가 딱 한 달만 '일간 이슬아'를 연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망설임 없이 구독 버튼을 눌렀다. 사실 유명해진 작가가 자신의 출발선을 달콤하게 추억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있었다. 그런데 웬걸, 매일 도착하는 이메일엔 불성실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우선 내용이 어떻든 이런 글을 쓰려면 하루를 다 소비해야 나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글밥이 많았고 '인생을 바꾸는 이메일 쓰기'라는 주제도 선명했다. 헤엄출판사를 차려 엄마를 직원으로 고용했는데 이메일을 쓸 줄도 모르는 분이라 이를 일일이 가르쳐 이메일 도사로 만든 얘기는 웃기고 감동적이었으며 중간에 세 명의 작가에게 부탁해 똑같은 조건에서 글을 쓰게 만든 뒤 그중 진짜 이슬아가 쓴 글은 어떤 걸까 알아맞히는 퀴즈를 낸 것도 기획력과 실천력의 결합이 낼 수 있는 최고치의 지점이었다. 이번만큼은 하루도 빠짐없이 일간 이슬아를 읽는 독자가 되었다.


어느덧 한 달이 지나갔다. 나는 마지막을 알리는 이슬아 작가의 이메일에 답장을 썼다. 지난 12월 3일 이후 우울했던 마음을 달래주었던 건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와 《일간 이슬아》였음을 고백하며 고맙다고 썼다. 그리고 3월 30일 토요일 오전에 성곡미술관2관에 갔다. 전날 보령 출신 전성배 형과 용산 일대를 돌아다니며 밤늦도록 술을 마시느라 힘이 들었지만 '적선(積善)하다'라는 주제로 열리는 사진가 이갑철·도예가 김성철 두 분의 전시를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나는 아엘시즌의 김미연 대표 덕분에 이 행사를 알리는 동영상도 찍었다). 사진과 도예, 그리고 동영상이 전시되는 전시회엔 이름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고 거기에 이슬아·이훤 커플도 와 있었다. 사진작가와 도예가의 합동 전시회이기에 '빛과 흙으로 빚어진 순간들'이라는 표현이 딱 맞춤 맞았다. 김성철 작가가 자신의 '호롱 연작'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이 이어졌는데 이야기를 듣는 이슬아 작가의 표정은 진지하고 겸손했다. 너무 유명한 작가라 좀 거만하거나 방어기제로 인해 낯을 가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내 윤혜자와 내가 운영하는 '독하다 토요일'의 멤버이기도 한 박효성 전 디자인하우스 에디터의 작품 해설을 들은뒤 잠깐 비는 시간이 되었을 때 놀랍게도 이슬아 작가가 나에게 알은체를 했다. 편성준 작가님이시다, 라고 하는 것도 의외였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내가 전날 보낸 이메일 내용을 기억하고 잘 받았다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왠지 부끄러워져서 바보 같이 웃기만 했고 당황한 듯 가방을 뒤져 명함을 한 장 건넸다. 이슬아 작가는 한지 명함에 쓰인 내 볼펜 글씨를 보고 '명함이 아름답다'라고 감탄했다. 그 말에 한껏 고양된 나는 두 사람이 이갑철 작가의 설명을 듣고 있을 때 이훤 시인에게 다가가 명함을 한 장 더 드릴까요?라고 물었다. 이훤 시인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내가 받은 걸 같이 보겠습니다, 같이 사니까요......라고 말하자 나는 "아, 네."라고 말하고 물러섰다. 생각해 보니 명함을 한 장 더 주겠다고 나서는 것부터 기이하고 창피한 일이었다. 괜히 스타일만 구겼다. 아무튼 이슬아 작가는 직접 만나면 더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이렇게 수다스럽게 쓰고 있다. 그날 우리는 농암주택의 눈 내리는 풍경을 담은 이갑철 작가의 사진 작품을 한 점 구입해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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