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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계의 '포티나이너' 이철희

국립극단의 연극 《삼매경》

by 편성준




술집에서 60~70년대의 팝음악이나 가요의 히트곡을 듣다 보면 너무 단순한 멜로디와 곡 구성 때문에 놀라곤 한다. 어떤 건 정말 코드 세 개를 적당히 버무려 몇 분만에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거기엔 다 당시의 '최선'과 '시대정신'이 들어 있다. 이철희 연출에게는 옛날 희곡들이 그렇다. 들어본 적은 있으나 제대로 본 사람은 거의 없다는 연극 《동승》의 극본도 마찬가지다. 한국 근대 희곡작가인 함세덕에 의해 1932년도에 쓰인 이 희곡은(작가는 6.25 때 사망) 1991년도에 지춘성이라는 배우에게 여러 상을 안겨준 작품이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면 너무 단순하고 진지하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함세덕 작가의 뛰어난 재능과 진정성을 알고 있는 이철희는 이번엔 1991년에 동승 '도렴' 역을 맡았던 지춘성을 모셔와 '메타 연극'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백일몽을 꾸어 본다. 35년 전 이 연극으로 최고를 맛보았던 지춘성은 평생 '동승'의 영광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닐 것이고 그때의 기억은 화석처럼 굳어갈 것인데, 그를 데려와 이 연극을 만들던 과정과 배우로서의 존재론적 고민을 메타인지 형식으로 다뤄보면 시대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창작론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마침 명동예술극장이라는 가슴 뛰는 무대와 선이 닿았고 국립극단 시즌단원들과 스태프들의 탄탄한 도움까지 받을 기회를 얻었다. 극단 코너스톤 대표로서 지원작 선정 기간에 온갖 잡일까지 혼자 짊어지고 끙끙대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판이 열린 것이다.


이전 작 《진천 사는 추천석》이나 《요새는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그, 윷놀이》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이철희의 연극은 코러스들의 율동과 대사의 합이 끝내준다. 이번에도 서유덕, 홍지인, 윤슬기, 정주호, 정홍구 등 그의 연극에서 낯을 익힌 배우들의 몸 움직임은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동물이나 바람 소리를 내라 하면 거기에 최선을 다하고 "이 역할은 좀 전형적이었으며 해"라는 극 중 연출의 주문이 떨어지면 수다스러운 촌부들의 전형적인 수다가 반복되는 식이다. 더구나 이번 작품은 필요할 때마다 천정에서 물이나 모래가 쏟아지고 위아래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무대 장치에 움직임 연출까지 따로 있었으니 배우들의 기량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다.

그런데 거기에 비하면 주인공 역을 맡은 지춘성의 연기와 발성은 많이 아쉽다. 개인적 취향일 수도 있으나 나는 지춘성 같은 배우의 목소리나 딕션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게다가 어제는 대사 실수도 많았다.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거의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고 있는 후배들에 비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게 그 배우로 인해 만들어진 연극인데 그 배우 때문에 힘들어했다는 건 아이러니다(부디 저만의 개인적인 까탈스러움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희곡에서 충청도 사투리를 천연덕스럽게 구사해 '충천도의 브레히트'라는 별명을 얻고 있는 이철희는 묻혀 있는 보석 같은 한국의 고전이나 근현대 작품들을 발굴해 오늘의 언어로 되살리고 거기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어제는 코너스콘의 배우들과 함께 그런 그의 집념이 국립극단의 인프라와 행복하게 어우러진 눈부신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 1849년에 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달려간 사람들을 포티나이너(49er)라고 부른다면 이철희는 한국의 고전을 향해 달려가 금싸라기로 만드는 연극계의 포티나이너임에 틀림없다.

2025년 7월 17일부터 8월 3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한다. 연극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싶은 분들은, 국립극단 시즌단원들의 연기가 얼마나 멋진지 경험하고 싶은 분들은, 이 작품을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원작 : 함세덕

재창작·연출 : 이철희

무대 : 이태섭, 조명 김창기 움직임 :이경구

출연 : 지춘성 곽성은 김신효 서유덕 심완준 윤슬기 이강민 정주호 정홍구 조성윤조영규 조의진 홍지인


<*오늘의 상식 : 49er>

1849년 골드 러시 때 금을 찾아 미국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을 칭하는 말. 1848년 한 제재소에서 제임스 마셜이라는 목수가 금을 찾아낸 이후 1858년까지 약 5억 5,000만 달러에 이르는 금을 채굴했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의 프로 미국 미식축구팀 이름도 이 역사적 사건애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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