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에 쓴 강보라 작가 작품집 리뷰
강보라 작가를 좋아해서 그의 첫 작품집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리뷰를 이번 달 《기획회의》에 썼습니다. 제가 강보라 작가의 신춘문예 당선작 리뷰를 썼을 때 작가가 문자메시지로 고마움을 전하며, 잡지사 에디터로 일할 때 몽스북 안지선 대표와의 인연으로 저의 첫 책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원고를 앉은자리에서 다 읽은 경험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인연이죠.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이라니, 제목이 참 요상하죠? 강보라는 글을 참 잘 쓰고 이야기를 잘 만드는 작가입니다. 이 책 강추입니다.
편성준 작가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강보라 지음, 문학동네, 202
2021년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강보라의 「티니안에서」를 읽고 깜짝 놀랐다. 일단 전통적 문예 경연 대회에 어린 여성이 성욕을 다룬 작품을 선보인 과감성이 심상치 않았고, 도발적 소재를 다루면서도 내러티브는 안정적이었으며 인간을 그리는 능력이나 메시지가 단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읽는 재미가 있었다. 신춘문예라고 하면 왠지 ‘예술혼’에 짓눌려 고답적이거나 교조적이 되기 쉬운데 이 작품에는 전혀 그런 구석이 없었다. 중학교 때 성욕이 폭발해 ‘걸레 삼총사’라는 오명을 얻고 폭력과 따돌림까지 경험했던 주인공과 그 친구 중 하나가 성인이 되어 티니안이라는 섬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 이야기에서 주눅 든 모습이나 죄의식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영화 <가족의 탄생>에서 정유미가 했던 대사 “헤픈 거, 나쁜 거야?”와 같은 당돌함이 느껴졌다. 마지막 헬기 장면에서 헤드셋을 부딪치며 웃는 두 여성의 모습에서는 안도감마저 느껴졌다.
이후 강보라 작가가 남편(역시 소설가인 박세회 작가)과 함께 신문에 연재하던 문화 칼럼 ‘동네의 발견’을 찾아 읽다가 계간지에서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이라는 단편도 읽었다. 한참 후 그 단편소설을 표제작으로 하는 작품집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이 나왔다. 작품집에는 데뷔작인 「티니안에서」와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말고도 다섯 편이 더 들어 있다.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어떤 이들에게는 호기심을,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불쾌감을 안긴 피사체라고 한다. 즉, 애매한 오브젝트의 결합이 주는 수수께끼와 마주쳤을 때 문화적 상류층은 거기에서 뭔가 읽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드는 반면 민중 계급은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당혹스러워한다는 것이다. 미술관에서 추상화 앞에 설 때마다 당혹감을 느끼는 나는 영락없이 후자 쪽인데, 강보라는 대학원 졸업 후 문화재단에서 일하며 미술이나 사진에 조예가 깊은 주인공 ‘재아’를 내세우면서도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이 주는 생경함 속에 숨어 있는 쇼비니즘chauvinism에 분노한다.
재아가 발리에서 만났던 ‘호경’의 일탈도 나중에 알고 보니 상류층이라서 가질 수 있었던 특권이었다. 하지만 훌륭한 소설은 제목과 주제만으로 모든 걸 말하지 않는다. 나는 재아가 남편 ‘현오’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상황의 공포를 묘사한 “마흔 이후의 삶은 내리막길을 내달리는 스쿠터처럼 무서운 가속도로 우리를 흔들었다. 현오와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꼭 붙들었다”라는 문장을 읽고 무릎을 쳤다. 무릇 소설은 이런 문장을 읽는 맛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문장은 「바우어의 정원」에 나온다. 출연했던 독립영화가 우연히 히트해 일약 스타 배우가 되었던 ‘은화’는 그 이후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연극 오디션을 보러 대학로로 간다. 3년 동안 세 번의 유산을 경험한 은화는 대학로에서 만난 후배 ‘정림’ 역시 자신처럼 유산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것도 아닌 유산의 경험을 털어놓게 만드는 오디션의 나쁜 형식을 욕하다가 그들은 예전에 함께 아르바이트 삼아 했던 드라마 치료 워크숍의 역할극 대사를 기억해 낸다.
‘그 말을 들으니 나는’으로 시작하는 그 대사는 졸지에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장치가 된다. “그 말을 들으니 나는 길가에 버려진 장갑 한 짝이 된 기분이야.”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저 창문의 눈송이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기분이야.” “그 말을 들으니 나는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봉지가 된 기분이야.” 당시에는 너무 힘들어서 마치 영화 <주먹이 운다>에서 최민식이 맡았던 인간 샌드백 같았다고 투덜거렸지만 세월이 흐른 뒤 민트색 모닝 안에서 다시 그 대사를 응용해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나는 진지하게 대사들을 지어내다가 결국 깔깔깔 웃어버리는 두 여성의 모습에 살짝 눈물이 났다.
창작자가 겪는 막연한 불안과 절망은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될지 모르지만 성과를 내고 인정받기 전까지는 지루한 지옥이다. 단편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은 기자를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로 한 ‘주영’의 이야기다. 디지털 매체에서 실시간 뉴스를 전달하는 데 염증을 느낀 주영은 ‘팩트’가 반드시 진실을 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면 때로는 세상을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깨닫고 사표를 낸 뒤 작업실을 얻는다.
작업실 건물에서 만난 사람들이 웹소설가 ‘유니스’, 그리고 ‘불과 흙의 궁합을 이루는’ 연인 ‘민홍’과 ‘이재’다. 유리 공예를 하는 민홍이나 유화 물감과 목재, 돌가루 등을 자유롭게 섞어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는 이재에 비해 소설이랄 것도 없는 글을 쓰고 있는 주영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창작에 대한 내적 동기, 사회의 인정이나 경제적 위기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만큼 맹렬한 창작욕 등이 그들에게는 있고 자신에게는 없는 것이라 느낀다. 결국 등단을 하고 작업실을 떠난 주영의 후일담으로 마무리되는 이 예술가 소설은 1980년대 미국 영화 <세인트 엘모의 열정>이나 앤드루 포터의 소설처럼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강보라는 소설을 잘 쓴다. 소설가가 소설 잘 쓰는 거야 당연한 일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잘 쓴 소설은 다 보여주지 않으면서 독자에게 다른 이야기까지 상상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직사각형의 찬미」라는 단편에 등장하는 “그때만 해도 내가 밥을 먹다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리거나 차 안에 아이들을 방치했다가 남편에게 따귀를 맞는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같은 문장은 너무나도 강보라답다.
편성준 작가
20여 년간 카피라이터로 근무했다. 2020년 퇴직 후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몽스북), 『여보, 나 제주에서 한 달만 살다 올게』(행성B), 『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북바이북), 『읽는 기쁨』(몽스북), 『나를 살린 문장, 내가 살린 문장』(메디치) 등을 펴냈고 글쓰기 강연과 책 쓰기 워크숍을 한다. 유머와 위트 있는 글을 지향하며 출판기획자인 아내, 말 많은 고양이 순자와 산다.
<기획회의> 636호 2025년 7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