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씻지 말라고 해서

공처가의 캘리

by 편성준

어젯밤 아내가
씻지 못하게 해서
그냥 잤다
이유는 자기가
씻지 않아서였다

나는 들어오면 곧장 씻는 편이고 아내는 끝까지 버티다 겨우 씻는 스타일이다. 평소 내가 더 청결하다는 얘기다. 어제는 동네 커피숍에서 일을 하다가 저녁시간에 딱 맞춰 들어오지 못했다고 아내에게 야단을 맞았으므로 씻을 틈도 없이 그대로 식탁 앞에 앉아 MBC뉴스를 보며 밥을 먹어야 했다. 그런데 내가 설거지를 다 마칠 때쯤 아내가 벌써 자리를 펴고 눕는 게 아닌가. 지난주 내내 지방을 전전하며 일을 했고 토요일엔 서초동 검찰개혁 집회까지 참여하느라 피곤한 데다가 또다시 월요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일요일 저녁 특유의 심란함이 겹친 것 때문일 것이다.

"그럼, 나 씻을게"라고 말하자 "안 돼, 그냥 일루 와"라는 아내의 명령이 있었다. 자기가 안 씻었기 때문에 나도 씻으면 안 되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나도 TV를 끄고 아내 옆에 숨죽여 누워 있다가 아내의 숨소리가 고르게 되자 조용히 몸을 일으켜 낮에 동양서림에서 산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신작 소설 [내가 여기 있나이다] 1권 앞부분을 조금 읽었다. 샤워를 하고 싶었으나 물소리가 들리면 자던 아내가 깨서 불호령을 내릴 것이 뻔하므로 그대로 참고 잤다. 공처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잤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대의 저린 손을 잡아줄 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