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인의 『몸, 내 안의 우주』
제목을 읽고 내 몸 안에 우주가 있다는 것은 과장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며 책장을 열었다. 하지만 남자 인간이 평생 일조 개 이상의 정자를 생산한다고 하고, 혈관의 길이를 합치면 수천 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하고,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37조 개라는 글까지 읽고 나니 내 몸이 우주라는 말이 좀 수긍이 되었다. 백만, 천만, 억, 십억, 백억, 그리고 조...... 조 단위는 얼마 전 뉴스에서 한수원 웨스팅하우스 불공정 계약 뉴스에서 본 건 말고는 처음 아닌가, 하는 자조적 유머가 머릿속에서 꺼져 가던 작은 램프를 켰다.
작가는 어떤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일생일대의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가 3년 6개월이나 이 책 집필에 매달린 건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한다(실제로는 5년 3개월 만에 나왔다). '난다'에서 나왔던 독서일기 『차라리 재미라도 없든가』나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만약은 없다』 같은 에세이에서 이미 작가의 남다른 필력과 통찰력은 경험했으나 이 책은 이전 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남궁인은 죽음과 가까운 몇 개의 과 중에서 고민하다가 응급의학과를 선택한 사람이다. 공부를 잘해서 의대에 간 사람이라면 의사로 성공해서 잘 먹고 잘사는 게 당연한 목표겠지만 남궁인은 그보다는 '어떻게 사는 게 가치 있는 삶인가'를 고민하는 이상한 의사가 되었고 그 고민의 실천으로 글을 쓰고 책을 쓰는 것이다.
유치하고 음란하기로 유명한 한 나는 책을 펴자마자 '생식' 편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거기엔 '인간은 생식이 아니라 쾌락을 위해 섹스를 하는 매우 드문 종이다'라는 건조한 문장과 함께 '인간의 성적 패턴은 사회·문화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혼인 제도와 성적 유혹을 의미하는 다양한 행동 양식이 탄생했으며 성을 소재로 한 무수한 창작물 또한 생산되었다'라는 인문학적 문장이 함께 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남궁인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은 기억 때문에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천문학자였던 칼 세이건이 별과 우주를 얘기하면서 인간의 본성과 역사를 이야기했던 것처럼 작가의 글 역시 응급실 의사의 일상을 다루면서도 인문학적 통찰이 가득한 문장을 구사한다. 남궁인은 인간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선이 필요하다면서 '환원주의에 따르면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은 탄소와 수소 분자가 혼합된 호르몬이 작용해 뇌 내 뉴런 안에서 나트륨과 칼슘이 탈분극되어 호감이라는 감각을 드러내는 일이다'라는 현란한 지식인의 문장을 구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지만 이내 크리스마스 이브에 응급실에서 당직 의사로서 겪는 생활인으로서의 허술한 속내도 드러낸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애인도 없고 스케줄도 없는 당직 의사 남궁인은 함께 근무하는 당직 간호사의 "외로울 땐 어떻게 견디세요?"라는 짓궂은 질문에 " 이 또한 유전자가 시키는 일이다, 나는 유전자를 극복할 수 있다, 아픈 사람 많으니까 일 열심히 해야지...... 그러면서 견뎌요."라고 의뭉을 떤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술 마시고 눈싸움을 하다 들어온 커플이나 남자친구와 처음 성관계를 하다 출혈이 멈추지 않아 온 여학생의 이야기는 미국 드라마 《E.R》의 파일럿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한다. 내가 기억하는 그 드라마의 첫 회는 푸줏간을 하던 아버지와 아들들이 칼부림을 하다가 각각 가슴에 칼이 박힌 채 실려 오면서 "아들아, 사랑한다" '아버지, 사랑해요"라고 외치는 장면, 그리고 사장님과 수갑을 차고 SM 놀이를 벌이다 사장님 심장이 멈추는 바람에 나체에 담요만 덮은 채 그대로 응급실에 도착한 여비서가 사모님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 등이었다. 응급실은 동서를 막론하고 어지간히 황당한 인간시장인 것이다.
드라마는 깨진 균형을 회복하고 자신이 원하는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려 애쓰는 주인공의 여정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에 책을 읽어보니 병원 응급실에 가는 우리들도 드라마와 똑같다는 걸 깨닫는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당황한다. 하지만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어 아픈 건지는 모른다. 남궁은 의학이라는 것도 기본 원리와 맥락만 이해하면 아플 때 큰 도움이 된다는 걸 독자에게 알려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한다. 누구나 긴급하게 아픈 상황에서는 기본에 충실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만성 알코올의존증으로 간이 나빠진 환자의 남편과 대화하는 장면은 그런 남궁인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환자의 호소와 그에 따른 처방을 얘기하면서 우리 인생의 단면을 관찰한다. 다들 비슷하면서도 다른 인생을 사는 우리는 병원 응급실에 와서야 평등해지는 건 아닐까.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인공 토마시는 '동유럽에 들어온 소련군과 그에 동조하는 정치 세력은 오이디푸스처럼 두 눈을 뽑아야 한다'라는 글을 신문에 쓰고 그걸 취소하지 않는 덕분에 의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유리창 청소부가 되어 살다가 죽는다. 쿤데라의 토마시처럼 옛날엔 의사나 화가, 작곡가 같은 사람들이 다 지식인이었다. 나는 남궁인이라는 의사가 우리 시대 지식인의 자존심을 조금 살려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의사이자 작가인 사람이 존재하는 사회는 그래도 조금 희망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페이스북 담벼락을 보니 얼마 전 5쇄 3000부를 더 찍어 지금까지 총 12,000부가 발행되었다고 한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발간 초기에 저자가 책을 내게 보내준 덕분에 재밌게 읽었는데, 개인적인 사정이 바빠 미루다가 이러면 안 되지, 하고 짧게라도 리뷰를 쓰자 하고 이제야 쓴다. 고맙습니다. 남궁인 작가님. 잘 읽었습니다. 책이 두꺼워서 아직 다 읽진 못했고요. 응급실에서 봬요. 아니, 그러면 안 되겠구나. 나중에 술집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