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리뷰
<좋은 극본과 천재적 연출이 만나면 이렇게 된다>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은 진즉부터 보고 싶은 연극이었는데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강훈구 연출에게서 재공연 한다는 연락이 왔다. 아내는 이미 낭독공연 포함해 두 번이나 보았다고 자랑을 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좋다고 하는 이 연극(전석 매진이었다)을 드디어 나도 보게 되었다는 생각에 신이 나 서울로 올라왔다(저 보령 살아요).
사람들이 왜 좋아했는지 충분히 알 것 같은 주제와 형식이었다. 이 극이 데뷔작이라는 서동민 작가는 2010년 재개발 이슈가 한창인 2010년의 은평구 한 빌라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그리고 손자, 손녀를 모여 살게 하고 그 한 복판에 '퀴어 문제'를 던져 넣는다.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다니다 군 제대 후 휴학을 하고 있는 오빠가 재수생 은빈의 복숭아향 립스틱을 자꾸 훔쳐 바르는 것이다. 오빠가 게이인지 트랜스젠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년엔 지방대 치대로 진학해 이 답답한 집안을 벗어나고 싶은 은빈은 울며 겨자 먹기로 오빠의 비밀을 지켜주는 동시에 그를 '그녀'로 만들기 위한 교육에 돌입한다. 네 살 어린 여동생의 도움으로 오빠가 여자가 되어 가는 과정은 상당히 귀여웠다.
'에뛰드' 같은 스무 살들이 쓰던 화장품 브랜드가 귀엽게 등장하는 것도 재밌지만 이 극을 정말 재밌게 만든 건 '전원 배역 교체'라는 카드를 꺼내 든 강훈구의 연출력이다. 처음에 며느리로 등장했던 김솔지가 다음 장면에서는 아르바이트하는 은빈의 친구로 등장해 화장법에 대해 떠들고 딸로 나왔던 박은경도 나중에 할머니 역을 맡는다. 남자 배우 둘도 마찬가지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우들이 옷을 여러 번 갈아입어야 하는데 체격이 모두 다르니 똑같은 디자인의 의상을 여러 벌 준비해야 하는 수고가 따른다. 이런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배우들을 괴롭힌 건 '서로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게 얼마나 힘든가' 라는 기본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더 나아가 강제로 배우들에게 모든 사람의 역할을 저마다 한 번씩 맡게 함으로써 '사람 사는 게 별 거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남성과 여성 구분도 별거 아니'라는 통찰 등을 아주 효과적으로 보여 준다. 극본도 뛰어나지만 그 극본을 두 배 이상 더 멋지게 해석한 연출의 공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연극이 시작될 때 박은경 배우가 나와 "이 집에서는 고추 말리는 쿰쿰한 냄새와 습기 냄새가 진동한다"라고 투덜대는데 아마도 거기서 연극의 제목이 나온 것이다. 고추 말리는 냄새는 지금까지의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세계를 표현하고 복숭아향립스틱은 상상도 못 했던 새로운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 두 가지가 부딪치는 세계가 재개발 열풍이 불고 있는 은평구의 연립주택이다. 두 시간 가까이 되는 러닝타임 내내 객석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건 코미디 요소 때문이 아니라 공감 포인트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애니메이션 '세일러문' 주제가가 나오고 허공에서 마이크가 내려올 땐 너무 좋아 자지러지는 관객들이 속출했다(세일러문을 잘 모르는 나는 억울했다). 좋은 극본과 천재적 연출이 만나면 이렇게 된다. 자신의 화장품을 챙기러 다시 연립주택으로 온 오빠 장면 뒤로 "연극, 끝!"을 외치는 박은경 배우의 경쾌한 목소리를 뒤로 하고 기분 좋게 극장을 나섰다. 기회가 되면 꼭 보시고 아니면 내년을 기다리시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2025년 9월 21일까지 공연한다.
● 일자 : 2025.09.12 ~ 2025.09.21
● 장소 :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 주최·주관 : 공놀이클럽
● 기획 : 변은서 심진우
● 연출 : 강훈구
● 작가 : 서동민
● 드라마터그 : 김지혜
● 무대감독 : 김동영
● 출연 : 김솔지, 남재국, 류세일, 박은경
● 후원 :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