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함이라는 사각지대를 돌파하는 용기

연극 《프리마 파시》리뷰

by 편성준


세상 일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감정적인 문제도 마찬가지다. 쟤가 나를 좋아하는가, 내가 쟤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가......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명확한 단어 옆에 '썸'이라는 애매한 단어를 만들어 세워 놓았다. '썸 탄다'라는 말은 서로 좋아지고 사랑이 피어나는 간질간질한 순간을 표현한 말이라 설레고 흐뭇하다. 하지만 여기에 강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어떤가. 당장에 세상은 지옥으로 변한다. 연극 《프리마 파시》 의 주인공 테사가 바로 그 지옥의 주인공이다.

『프리마 파시(Prima Facie)』는 인권 변호사 출신 극작가 수지 밀러(Suzie Miller)가 써서 2019년 호주에서 초연하고 미국 웨스트엔드·브로드웨이를 휩쓴 화제의 연극이다. 토니상과 올리비에상 여우주연상도 받았다. 유능한 변호사 테사는 회사에서 가깝게 지내던 동료와 성관계를 가지려다 마음이 바뀌어 거부했지만 묵살당한다. 다음날 아침 일어난 테사는 자신이 강간을 당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변호사로 일할 때와 막상 자신의 일로 닥쳤을 때가 같은 수 있겠는가. 그녀는 간밤의 악몽을 씻어내고 싶은 마음에 무심코 샤워를 해버림으로써 스스로 중요한 증거를 없애버린다. 경찰에 고소를 했지만 막상 사건을 재구성해보면 애매한 구석이 많다. 동료와는 오래도록 좋은 감정을 교환했으며 성관계도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애매하다고 덮어버리기엔 너무 억울하고 수치스러운 사건이다. 이런 모든 과정을 어머니를 비롯한 지인들이 보고 있는 법정에서 몇 번이나 복기하는 건 고통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녀는 멈출 수가 없다. 멈추면 진실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제목으로 쓰인 라틴어 ‘프리마 파시’는 “표면상으로 보기에(At first sight)”라는 뜻으로, 법 체계가 표면적인 증거만을 요구하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이번 한국 초연은 이자람·김신록·차지연이 번갈아 테사 역을 맡았는데 아내와 나는 이자람을 택했다. 판소리 역시 고수와 소리꾼 단 둘이 꾸미는 무대라 일인극 설정이 익숙한 데다 이자람에게는 지적이고도 실천적인 예술가로서의 저력을 이미 여러 번 확인했기 때문이다. 커다란 책상과 걸상 말고는 별다른 소품이 없는 무대 위에서 온갖 지문과 대사, 나레이션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120분 드라마를 꽉 채운 그의 카리스마에 감동했다. 아내는 이 연극을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프리마 파시'의 내용이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정치권 내 성비위 사건과 처리 과정부터 결과까지 너무나 닮아 있기에 한 말일 것이다. 연극은 시대의 거울이며, 무대에 선 배우의 진심은 곧 시대의 고통과 변화를 담은 울림이다. '프리마 파시'는 법을 지배하던 변호사가 삶의 한가운데에서 피해자로 서게 된 순간, 우리 사회가 얼마나 공정하지 않은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연극이니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2025년 11월 2일까지 리미티드 런(Limited Run)으로 공연된다. 《테베랜드》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신유청 연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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