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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Oct 08. 2019

건방진 고양이 순자와 과격한 아내 혜자

고양이 순자는 스코티시 스트레이트입니다

내 자리에 누워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듣고 있는 순자.

우리집에는 순자라는고양이가 한 마리 산다. 귀가 접히는 품종인 스코티시 폴드 형제 사이에서 유독 귀가 쫑긋한 '스코티시 스트레이트'로 태어났다는데 털이 까맣고 얼굴이 동그래서 솔직히 그리 예쁜 고양이는 아니다. 사진을 찍어도 얼굴선이 잘 안 잡혀 검은 털뭉치처럼 나온다. 고양이 사진이 많이 올라오기로 유명한 인스타그램에 가보면 정말 미모가 쟁쟁한 고양이들이 차고 넘치는데 거기를 들어가 누가 올린 고양이 사진이나 동영상을 찾아보다가 순자를 쳐다보면 얘는 그냥 순박한 시골 아낙네 수준이다.


그렇다고 성격이 착하고 사근사근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일단 이름처럼 순하긴 한데 잠이 너무 많아서 아침에 깨 잠깐 활동하는 것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잔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다. 거실에 있는 비싼 가죽의자가 순자의 주요 취침 장소인데 자기집을 놔두고 하도 거기만 애용하는 바람에 우리는 앉아볼 새도 없이 어느새 엉덩이가 닿는 부분의 가죽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전체적으로 낡아버렸다. 어쩌다 깨어 있을 때도 와서 애교를 부리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순자야, 하고 불러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창틀 위에 앉아 하염없이 방충망 넘어 창밖을 바라볼 뿐이다. 순자가 발톱으로 플라스틱 망에 흠집을 내서 그렇기도 했지만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아내는 어느날 방충망을 모두 특수강으로 된 '방범용'으로 바꾸었다. 비싼 돈이 들었다.

아내는 순자를 다른 집에 맡길 때마다 분해서 성질을 부린다. 얼마 전에 둘이 지방으로 취재 여행을 떠날 일이 생겨서 열흘 정도 순자를 친한 후배에게 맡겼는데, 문제는 얘가 거기서 너무나 잘 지내는 것이었다. 순자가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과 사진을 카톡으로 전해 받은 우리는 저녁이 되면 호텔 근처 식당에서 "지금쯤 순자는 우리를 다 잊고 신이 나서 있겠지?" "그럼, 걔네집이 얼마나 넓은데. 카톡 사진 보니까 마음껏 뛰어다니느라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살이 다 빠졌더라."라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우울하게 저녁을 먹곤 했다. 여행에서 돌아오기 전날 아내는 술에 취해 "여보, 우리 순자 그냥 걔네 집에 줘버릴까?"라고 말해서 나를 경악케 했다. 남의 집에서 그렇게 멀쩡하게 지내는 모습이너무 괘씸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밤 화가 난 아내를 진정시키느라 고생을 해야 했다.

여행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후배 집으로 가서 순자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녀가 쓰던 플라스틱 욕실과 모래, 남은 사료 등도 함께 가져왔다. 행차가 보통 요란한 게 아니다. 보통 우리 부부가 외출에서 돌아오면 순자는 시치미를 뚝 따고 욕실에 가서 앉아 있는다. 어서 와서 내 털을 빗기라는 것이다.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행태다. 오늘은 내가 새벽에 일어나 책상에 앉아 잠깐 취재한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가 나가보니 순자가 어느새 내 자리에 누워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듣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순자를 들어 창틀에다 내던지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라디오를 들었다.

아까는 책상 위 노트북 근처로 올라와서 내 작업을 방해하길래 욕실로 안고 가서 브러시로 털을 빗겨 주었다. 털을 빗겨주면 좋아서 교성을 자주 지르는데 아까도 그러다가 내가 뭘 잘못하는 바람에 약간 아프게 했더니 순간적으로 화를 내며 내 손을 할퀴려 들었다. 그런 순자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아내가 나를 순자처럼 여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쁘지도 않은 주제에 잠만 자고 뭐든 제 마음대로 하는 순자. 잘생기지도 않은 주제에 잠도 많고 급기야 제 마음대로 회사도 그만둬 버린 남편. 순자와 나 그리고 혜자. 순자와 혜자 그리고 나. 트라이앵글. 중심은 순자. 다시 순자를 쳐다보았다. 아까보다는 좀 귀여워 보였다. 간식이나 하나 줘야겠다. 일루와. 어제도 줬는데. 이거 버릇되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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