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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Oct 22. 2019

세헤라자드 할머니

모르는 사람들과 한 장소에 있으면 생기는 일들

어떤 장소에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되는 순간이 있다. 차를 기다리거나 가게 문을 열기를 기다리거나 하는 이른바 '틈새시간'들이다. 대부분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있거나 옆사람과 소곤거리거나 하지만 그런 장소에서도 커다란 목소리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이 하나 둘씩은 꼭 있기 마련이다. 오늘 아침 침을 맞으러 수유시장 안 경희현한의원에 와서 의원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병원 복도 동글 걸상에 한 시간째 앉아 있는 이 순간이 바로 그렇다.

이 의원은 8시 반에 문을 열고 9시 반부터 진료가 시작되는데 매일 새벽부터 환자들이 와서 줄을 서기로 유명하다. 어깨가 아픈 나도 오늘 새벽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와서 대기번호 10번을 받았다. 물론 대기번호는 매일 와서 줄을 선 환자들이 자율적으로 만들어낸 제도다. 요즘은 그냥 서서 무작정 기다리지 않아도 번호표를 만들어주는 편리한 어플들이 많으니 그런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자고 말하고 싶지만 평균 연령이 60세가 넘는 곳이라 나 혼자 그런 스마트한 멘트를 날릴 엄두가 나지 않아 입을 다문다.

그래서 이런 곳에 올 때는 책을 한 권씩 들고 오는 편이다. 오늘은 지난주 제주도 여행에서 구입한 정지우의 <행복이 거기 있다, 한 점 의심도 없이>라는 산문집을 가져왔지만 세 꼭지의 산문을 읽은 뒤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다. 어느 세헤라자드 할머니 때문이다.

머리가 하얗게 센, 70세 정도 된 할머니 한 분이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시는 중이다. 나이에 비해 의외로 성량이 풍부하고 약간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를 가지셨다. 그런데 오늘 만난 게 분명한 다른 할머니 한 분에게 계속 이야기를 하신다. 덕분에 나도 그 할머니의 일상을 소상히 알게 되었고 그 할머니의 아들의 행태와 친구들의 평판과 나아가 할머니의 인생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또한 얼마 전에 만난 스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저렇게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올까. 차라리 여기서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받아 적어 소설을 하나 써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다행히 머리를 금발로 물들인 간호사가 일찍 출근을 해 의원 현관문을 열어준다. 8시 23분이다. 이제 병원 소파 할머니들 틈 사이에 앉아 다시 책을 읽어봐야겠다. 의사 선생은 9시 반에 오시고 나는 대기번호 10번이다. 이게 오늘 아침 나의 포지션이다. 그래도 어디 가지 않고 끈질기게 기다린 덕분에 할머니들 틈에 섞여 들어와 소파 맨 오른쪽 구석에 앉아 이 글을 몰래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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