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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Oct 26. 2019

여행을 하는 이유

일상을 멈추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

한밤중에 목이 말라 깨었다. 물을 마시고 다시 잠을 청했지만 오래도록 잠은 들지 않고 머릿속에서는 이런저런 상념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아내는 아까부터 베개도 베지 않고 이불을 걷어차며 잠꼬대를 한다. 억지로 이불을 여미고 베개를 받쳐준 뒤 일어나 또 물을 마셨다.

우리는 늘 어디론가를 향해 달려간다. 어렸을 때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등을 쉬지 않고 다니며 어른이 되느라 정신이 없었고 더 나이가 들어서는 직장을 다니며 경력을 쌓고 돈을 버느라 날마다 비슷비슷한 일과를 반복하며 살았다. 아마도 그런 일상을 벗어나는 것은 잠시 여행을 떠날 때 정도가 아닌가 한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자신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시간. 그래서 사람들은 편안한 집을 놔두고 여행을 꿈꾼다. 생각만 해도 가슴 뛰지 않는가. 어느 날 휴가를 내고 지도책을 펴 계획을 세우고 며칠밤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낯선 곳에 도착한 우리들은 식당에 들어가 평소에 먹지 않던 음식을 사 먹고 바닷가나 숲을 오래도록 둘러본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들어가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나쁜 여행은 시아버지 시어머니, 남편, 시동생까지 모시고 콘도에 놀러 가 세끼 밥을 해 먹는 것이다. 지어낸 얘기 같지만 실제로 그런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멀리 떠나도 하나도 변하지 않는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일상의 연장일 뿐이다. 여행을 가서 그가 무슨 메뉴를 선택하는지 어떤 것을 보고 싶어 하는지를 살피면 그 사람의 내면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전에 함께 어디론가 떠나서 일상이 아닌 며칠을 보내고 오는 것은 그동안은 몰랐던 서로의 디테일을 들여다보는 기회니까.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일을 아주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침에 일어나기만 하면 출근을 하던 생활을 오래도록 하다가 갑자기 바뀌니까 좀 어리둥절할 때도 있다. 마치 전쟁터에서 팔을 잃은 사람이 가끔 없어진 팔 어딘가 가렵다고 느끼는 것처럼 나도 이제 더 이상 월요일 주간업무회의를 할 필요가 없는데도 일요일 저녁이 되면 여전히 마음이 심란해지고 또 금요일 저녁이 되면 괜히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한다. 회사를 그만둔 지금은 어쩌면 여행을 하는 시간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이제 평소에 일 때문에 못 읽던 책도 읽을 수 있고 영화나 드라마를 몰아 볼 수도 있다.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하니까 하루 종일 어떤 글을 쓸까 궁리하고 그러다가 뭔가 떠오르면 에버노트에 끄적끄적 적거나 녹음을 해놓을 수도 있다. 요즘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글을 쓰다가 졸리면 다시 잠자리로 돌아가 쿨쿨 자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생이 그렇듯이 여행비는 충분하지 않고 여행 중에도 챙겨야 할 것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여행을 떠나도 은행이나 빚쟁이들에게서는 시시때때로 문자메시지가 오고 예전 비즈니스 파트너들은 전화를 해서 급한 일이 있는데 어떡하냐고 발을 구른다. 참석은 하지 못하더라도 결혼 축하금, 조의금을 보내야 하고 축하나 위로 메시지도 전해야 한다. 여행지에서의 밥은 집밥을 해 먹는 것보다 비싸고 낯선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나에게 친절한 것도 아니다. 생각해 보면 언젠가는 돌아갈 날짜가 있고 돌아갈 곳이 있기에 여행인 것이지 지도도 없고 돌아갈 날도 알 수 없는 채 돌아다닌다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다. 방랑자의 하루하루는 얼마나 고되고 막연할 것인가.

그래도 일단 멈췄다. 나는 당장 24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고 원하기만 한다면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 기차값이 모자라면 천천히 걸어도 되고 여행지에서 잠깐씩 아르바이트를 구해도 된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아내라는 든든한 동반자도 있다.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다시 만나지 못할 소중한 시간이다. 다시 한번 웃으며 하늘을 보자. 아내와 나는 내일 또 무슨 메뉴를 고르고 어떤 곳을 구경할 것인가. 누구를 만나게 될 것인가. 내일의 날씨는 어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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