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묻는 PTA의 블록버스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리뷰

by 편성준


이런 영화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소재는 물론 주제의식까지 뛰어나고 이해하기도 쉬운, 폴 토머스 앤더슨 영화 중 최고를 만났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왜 이 영화가 최고인지 내 생각을 간단히 써 보기로 했다.


1.

'프렌치 75'라는 테러 단체의 멤버였던 밥 퍼거슨(리오나르도 디캐프리오)과 그의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 : 이름을 이렇게 짓다니!)의 위치가 알려지자 록조 대령(숀 펜)은 수하의 군인들을 이끌고 고등학교를 점령한 뒤 학생들을 심문한다. 이런 장면은 이미 상상력의 자장을 넘어선 것이다. 불과 며칠 전에도 외국인들을 다짜고짜 체포해서 감금·추방하던 트럼프 행정부의 행태와 다를 바 없고, 작년 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12.3 내란 사태 역시 멀쩡한 정신으론 상상하기 힘든 사건이었으니까.


하지만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이렇게 무식하고 국가주의·순혈주의, 남성우월주의 등에 빠진 우파들만 비난하는 게 아니다. 왕년의 혁명가였던 밥 역시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혁명 동료였던 퍼피디아 비버리힐스(테야나 테일러)의 아이를 거둔 뒤 신분을 숨기고 지내는 그는 술과 약물이 찌든 정키가 되었고 딸에게는 "제발 철 좀 들라"는 소리를 듣는 루저다. 임신한 몸으로 기관단총을 휘갈기던 퍼피디아 역시 알고 보면 허세 작렬이었을 뿐이다. 세상을 바꾸겠다던 흑인 여성 혁명가는 임무 도중 백인 우파 군인 록조 대령과 눈이 맞아 성관계를 갖고 윌라를 임신하지만 뻐꾸기가 종달새 둥지에 제 새끼 밀어 넣듯 딸을 밥에게 맡기고는 자신은 배신을 때림으로써 결국 조직을 와해시켜 버린다.


2.

딸을 지키기 위해 기진맥진 달리는 밥의 모습은 처량하면서도 한편 웃음이 난다. 이 지질한 역을 왕년의 꽃미남 리어나르도 디캐프리오가 맡았다는 것 역시 백미다. 앤더슨 감독은 배우들과의 친밀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아마 평소 어린 백인 여성들만 골라 사귀는 디캐프리오이기에 "나 흑인여자 좋아해!" 같은 대사를 만들고 같이 낄낄 댔을 것이다. 가장 웃기는 건 밥이 예전 혁명본부에 전화를 걸어 딸의 행방을 묻자 고지식하게 암호에 대한 대답부터 하라고 고집하던 조직원과의 말싸움이다. 16년이나 지났는데 그걸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화를 내며 정답보다는 스마트폰 충전에 더 신경을 쓰는 밥의 모습은 우리 정치권에서 볼 수 있는 586 운동권 세대를 떠올리게 해서 씁쓸했다.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이라는 돈 많은 우파들이 만든 단체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어 안달하는 록조 역의 숀 펜의 존재감은 정말 최고다. 표정부터 걸음걸이, 그리고 친자 확인 시퀀스와 터미네이터 같았던 부활 장면까지 메소드 연기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래도 가장 멋있는 존재는 밥의 딸 윌라다. 그녀는 똑똑하게 자라나 아빠를 챙기고 친구들과도 올바른 정치의식을 공유한다. 납치 이후에도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을 놓치지 않고 우여곡절 끝에 고속도로 추격전에서도 승리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아버지에 이어 자유를 위한 투쟁을 이어간다.


3.

영화에서 가장 멋진 인물은 좌파의 밥도 아니고 우파의 록조도 아닌 카라데 선생 센세이 세르지오(베니시오 델 토로)와 청부업자 아반티(에릭 슈웨그)다. 가는 곳마다 밥을 도와주는 세르지오 센세와 유색인종 노동자들의 연대의식은 눈물겹다. 그리고 잠깐 등장하지만 많은 여운을 남기는 아반티의 존재는 어리둥절할 지경이다. '어린 여자아이는 죽이지 않는다'라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결국 목숨을 희생하는 존재라니. 이는 창작자가 게을러서 불러온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니라 세상에 이런 인물이 하나쯤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PTA의 바람 아니었을까, 감히 짐작해 본다.


4.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내린 결론은 엉뚱하게도 '혈연이나 유전자는 다 개뿔'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즉석으로 친자 확인 소동까지 벌이며 혈연에 집착하던 록조는 결국 윌라가 자신의 딸임을 확인했지만 냉정하게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냈고, 오히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밥은 그녀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혁명가라는 명분을 일종의 '패션'으로 소비하던 퍼피디아와 달리 윌라는 자신이 나아갈 바를 스스로 정하고 그 신념을 지키며 살아간다.


결국 인생은 과거나 배경보다 현재의 생각과 통찰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리오나르도 디캐프리오, 숀 펜, 그리고 라디오헤드의 조니 그린우드 같은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낸 PTA는 진정한 천재 아닌가 싶다. 그가 뉴욕영화학교에 입학했다가 "여기 와서 터미네이터 2를 만들고 싶은 사람은 지금 나가라"라는 교수의 말을 듣고 즉시 자퇴한 뒤 그 등록금으로 영화를 찍었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그때 교수는 "예술영화도 영화고 터미네이터 2 역시 영화다"라는 열린 태도를 보였어야 했다. 그런데 똑똑한 PTA는 교수가 하지 않은 그 말을 스스로 깨닫고 이후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쌓아 온 것이다.


나는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를 포르노 버전으로 보는 것 같았던 《부기 나이트》와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걸작 《데어 윌 비 블러드》를 가장 좋아했는데 이제 이 영화를 더 높은 곳에 놓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보령의 명보시네마에서 한 번 보았으니 서울의 아이맥스관에서 한 번 더 보고 판단할 생각이다. 강추한다. 꼭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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