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삼하 연출의 《벚꽃동산》
어제 여행자극장에서 연극을 지켜보면서 '내가 그동안 벚꽃동산을 몇 번이나 보았을까' 헤아려 보았다. 정말 완벽했다고 생각했던 김광보 연출의 벚꽃동산부터 최근 전도연과 박해수가 나왔던 사이먼 스톤의 벚꽃동산까지 적어도 4~5개 버전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나는 또 벚꽃동산을 보고 있는가? 바로 문삼화 연출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빠힌으로 김시유 배우가 나오기 때문이다. 역대 로빠힌은 다 체구가 큰 편이었는데 체구가 작고 소년 같은 눈망울을 가진 김시유가 연기하는 로빠힌은 어떤 모습일까 너무 궁금했던 것이다. '에쿠우스'에서 알런 역으로 처음 만나 팬이 된 김시유 배우는 맡은 역마다 최선을 다하는 멋진 배우인데 이번 벚꽃동산 출연 문삼하 연출의 작품이라 참여하게 된 것이지 로빠힌 역이라는 건 상상도 못 했다고 한다. 농노의 자식으로 태어나 부동산 재벌로 변신하는 로빠힌은 극 마지막에 '백과사전에도 나오는' 벚꽃동산의 주인이 되지만 그의 마음은 기쁘지만은 않다. "한겨울에도 맨발로 뛰어다니던 아이, 걸핏하면 얻어맞아서 피를 흘리던 그 아이가 이제 이 벚꽃동산의 주인이 되었습니다!"라고 외치는 김시유의 처연한 표정은 문삼화의 결단이 성공적이었음을 증명했다.
운 좋게도 연극이 끝난 후 드라마터그 배선애 선생의 사회로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원작과 달리 이 연극에서는 마지막에 늙은 하인 피르스가 집 안에 갇히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이 지점이 연극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안톤 체호프 원작에는 피르스의 "산다고 살았는데, 사는 게 아니었네..." 같은 작가적 대사가 나오는데 문 연출은 삶이 그렇게 문학적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 잠들었던 피르스가 뒤늦게 깨어나 닫힌 문을 두드리는 장면으로 바뀐 것이다. 이 밖에도 모스크바로 떠나는 가정교사 빼짜의 주머니에 슬그머니 지폐를 넣어주는 로빠힌의 모습도 원작과 크게 달라진 지점이다. 문삼화 연출은 돈 앞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는 확신이 있었고 이를 확장시켜 100년 전 세상을 지배했던 '계급'이 이젠 '자본'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마술 시범을 보이던 샤를로따가 여기선 춤을 선보이게 된 데는 문예주 배우의 공이 컸다. 문예주 배우가 문삼화 연출과 대화를 나누다가 춤을 추는 게 어떠냐고 했고 곧바로 절도와 유머가 살아있는 춤을 고안해 냈던 것이다. 문삼화 연출은 샤를로따가 떠날 때도 "오, 고독이여. 존재의 가벼움이여!" 같은 밀란 쿤데라 식의 대사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바랴가 헤어질 때 로빠힌의 풀 네임을 또박또박 발음하는 장면도 체호프의 희곡엔 없던 대사다. 긴 연극을 100분 내외로 줄였지만 오히려 더 탄탄해진 느낌이 드는 건 이와 같은 스태프와 출연자들의 간절한 마음과 노력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딱 한 사람만 질문을 할 수 있다는 진행자의 말에 얼른 손을 들고 김시유 배우에게 '역대 로빠힌 중 가장 왜소한 배우였는데 그 역을 맡을 때 심정이 어땠는가'와 '로빠힌은 벚꽃동산을 차지하고도 마냥 기뻐하지는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라고 물었고 김시유 배우의 대답에 감탄했다. 그는 엄연한 계급사회였던 당시 러시아의 배경과 하층민 출신의 로빠힌이라는 사람의 내적 고민까지 모두 염두에 두고 복잡한 인물을 연기했던 것이다. 행사가 끝나고 극장 밖으로 나와 만난 김시유 배우는 '문삼화 연출이 로빠힌은 좀 무식하고 거칠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일부러 양복에 흰 양말을 신었다'라는 깨알 정보도 들려주었다. 자세히 보면 로빠힌이 입은 양복도 사이즈가 좀 커서 줄인 채 입은 걸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세심한 노력들이 좋은 연극의 바탕이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있는데 마침 의상을 맡은 최원 선생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드렸다. 문예주 배우와는 12월에 올라가는 신작으로 다시 만나기로 했다. 연극도 좋았고 사람들도 정다워 이래저래 기분 좋은 저녁이었다.
● 원작 | 안톤 체호프
● 연출 | 문삼화
● 드라마터그 | 배선애
● 기획 | 김나리
● 무대 | 김혜지
● 의상 | 최원
● 출연 | 김나진, 김단경, 김수아, 김시유, 김지원, 문예주, 문일수 등
● 의상 | 최원
● 기간 | 2025.10.15(수) ~ 2025.10.26(일)
● 장소 | 여행자극장
● 기획·제작 | 어처구니 프로젝트